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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나의 시

아들아 아들아 울지 마라 나는 그런 자격이 없다 애비라는 나는 네가 태어나던 순간에도 탄생의 축복에 기뻐하기보다 앞으로 포기해야할 저질 같은 욕망들의 개수를 세며 내 지갑의 잔고를 비벼보았다 너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조금씩 넓혔던 집 평수와 자동차도 뒤이은 불행이 닥치면 쉬이 너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네가 대학에 떨어지던 해, 가장 슬펐던 건 네가 이루지 못한 꿈 때문이 아니라 내가 포기해야할 작은 욕망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들아, 울지 마라. 어차피 나는 그 눈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 저 쉼 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피 같은 돈을 쓰지 마라 하루에 그 녀석이 몇 번을 다녀가도 여전히 나는 망쳐버린 인생이다 아들아, 이제 그만 나를 보내고 잊은 채 살아가라 더보기
취객(醉客) 왜 그랬냐, 물으면 늘 취해서라고 답했다 그런 종류의 변명은 다음이 없어 편안함을 느꼈다 그날도 취해있었다 영수증은 바로 찢어버리고 무엇을 묻든 그러려니 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날을 불살랐다 분명 불타고 있었다 속부터 겉까지 검게 변해가며 연료가 모자랄까 급히 알코올을 들이 부었다 옷을 잡아끄는 것들이 버거워 벗어버리고 부끄러움도 지워버리고 결국 아침은 찾아왔고 눈 속에 들어온 어색함만큼 커다란 짐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흩어져 희미해진 자아를 파고드는 물음 속에 해줄 말은 역시 취해서였다 혹여 알코올이 날아갈까 입을 틀어막았다 더보기
결혼은 해야지 -결혼은 해야지 마치 처음 꺼내는 듯 툭 던져지는 교묘함 -밥은 먹어야지 댐을 손가락으로 막는다 야지의 사령관은 늘 최소한의 문제인 양 ‘그래도’와 함께 공부는 해야지 학원은 가야지 대학은-취직은 야지야지 신호를 보냈다 수많은 폭격 속에서도 난 늘 ‘말아야지’ 진지를 구축하고 경계를 서고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때론 암구호를 모르는 병사처럼 묻지마 저항을 했지만 결국 사령관님은 징계처리 실상 ‘해야지’는 ‘말아야지’를 동시에 수반한 명령이라 난 가끔 내 진지가 어느 쪽인지 햇갈려 엉뚱한 곳에 포탄을 날리기도 했다 역시나 징계처리 평온한 가정은 훌륭한 식사에서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일단 밥부터 먹어야지 더보기
혈흔 길게 늘어진 자국이 인생에 비해 너무 짧다 어린 시절의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끝을 보지 못한 습작이 내는 비릿한 젖은 향이 올라온다. 붉은 그림이 그리는 선을 따라 하얀 뱃길이 열렸다 건너갈 수 없는 이들이 열을 지어 소리친다. 문득 그날의 소리가 들렸다. 새벽의 침묵 속에 비틀려 들어가던 나사 박는 소리 폭포를 타고 오르던 빗방울 소리 오래된 신발을 끄는 듯 무정한 소리 숯 보다는 화려하게 타고 싶었다. 그러곤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누가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혈관이 모두 터져나갈 때까지 깨어있고 싶었다 더보기
개구멍 고양이가 힘껏 뛰었지만 새는 금새 날아올라 제 집에 틀어박힌다 나뭇가지 끝, 아슬하게 메달린 아지트로 고양이의 눈이 향한다 잠시 으르렁 거렸지만 이내 포기한다 엊저녁, 집에 가는 길 미친개가 쫓아왔다 동네에서 소문으로 듣던 그 개가 분명했다 물리면 미치거나 죽는다던 뛰었다, 힘껏 학교 체력장 때도 어슬렁 대던 내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허나 곧 막혔고, 주위는 어두웠다 가방을 손에 쥐고 좌우로 흔들었다 투우사 비슷한 심경으로 개를 직시했다 덤벼라, 덤벼, 난 안 죽는다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소리를 뱉어내던 순간, 개는 크게 짖으며 달렸다, 각오와 달리 난 뒤로 넘어져 버렸고, 미친개는 건물 구석의 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돌아오는 내나 뒤통수가 근질거려 몇 번이나 돌아보곤 했다 미친개의 몸에 붙은.. 더보기
화가 날 일이 많다 듣다보니 결국 그 얘기다 세상이 바뀌었다, 위기의식을 가져라 변해야 한다, 노력해야한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대로신지 이탈리아, 스페인, 호주, 일본.. 안 가본 곳이 없는 이 친구 덕분에 나는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아진다 한 번 갔다 온 사람이 이리도 빠삭한데 무엇하러 나까지 가겠는가 잠시면 된다던 텔레마케터는 15분 째 허공에다 대사를 읊는 중이다 자기 할 일을 끝까지 다하는 ‘잠시’란 나에게 영원과도 같았다 굳이 전화를 끊지 못하는 나는 누구에게 예의를 차리고 있는가 ‘동의하시나요.’ 설마요 밥 먹으라 한다 너 때문에 차렸다, 한다 안 먹는다고 하니, 약속이 있냐고 한다 불행히도 약속은 없으나 먹기 싫다, 했다 그러면 밥 먹으라, 한다 엄마가 부장님과 겹쳐 보였다 어디가냐, 했더니 어디 좀 간단다 별일.. 더보기
드림 고등학생이 되고 나선 항상 엎드려 있었다. 수업 시간, 심지어 체육 시간도 엎드리거나 보건실로 향했다. 교사들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아니, 안 했을 수도 있다. 그게 서로에게 좋다고 무언의 합의가 된 듯하다. 2학기 기말고사 시간도 예외 없이 엎드렸다. OMR 답안지에 이름과 과목만 적고 대충 찍은 다음 바로 엎어졌다. 한참을 자고 나서 정신이 번쩍 -사실 왜 놀란 건지- 들었을 때 5분 지나있었다. 안심하고 다시 잠든 후부터는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50년이 흘러갔다. 웃긴 것은, 꿈속에서 내가 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더보기
머머리 나이 보다 젊어 보이시네요 거기까지는 좋았다 보통 그 나이쯤 되면 많이들 벗겨지시던데 그렇지, 일반적이지. 나도 다행히 오빠는 숱이 많으시네요 다행히 기술이 발전했지 저는 도저히 벗겨진 분들은 남자로 안 보여서 ...일반적이라며 다행이에요 그래, 아직 사랑은 아니니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