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화/나의 시172 꽃샘추위 3월은 가장 추운 계절이다 삼일절과 함께 난방과 온수는 사라졌고 봄 햇살에 들뜬 사람들의 기대 속으로 시베리아 고기압은 칼끝을 찔러왔다 몇몇이 죽어나갔다 얼음은 아직 땅속에 남아있었다 서둘러 핀 꽃들이 이내 옷을 접었다 벌들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향기는 아직 필요 없었다. 몇몇은 폐 속에 고드름이 맺혀 죽어나갔다 땅 속에서 썩은 냄새가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 봄비 속으로 세균들이 흘러내렸다 아직 새벽은 검고 해는 없었다 2020. 5. 4. 제목기(除木器) 거실이 좁아 나무를 벴다 아버지는 어둡다며 형광등을 갈아끼웠다. 집은 껍질을 태워간다. 불이 다시 하나둘 켜졌다가 이내 꺼졌다. 저녁을 준비하던 어머니는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맛이 예전만 못하다며 아버지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베란다에서는 봄꽃이 멀리가지 못하고 수근거렸다. 몇몇은 올해 농사가 이미 망했다고 느낀다. 잎사귀는 그래도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산소가 방안에 조금 퍼진다. 거실 마루가 너무 딱딱하여 서있기가 힘들다. 천장의 밝기가 수시로 변하여 밤낮이 헷갈린다. 밤이 지속되어 모두가 잠에 빠졌다. 작은 새싹은 마루 틈새에 깨어있었다 2020. 3. 29. 작은 빛 여우에게 듣고서야 장미가 보였다 침묵은 잔잔한 물결을 드러내 보였고 아껴두었던 단어가 자리를 잡았다 희미한 빛을 따라 길을 걷는다 너무 밝은 빛은 피해야한다 간혹 빛이 빛에 지워졌다 메마른 사막에서 친구는 명확했다 매서운 바람에 언덕이 밀리고 다음 날이면 새로운 세상을 맞았다 기뻤다.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것이 무엇이든 삶은 소중해졌고, 짝은 여전히 모래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 풀이 돋아났다, 곧 몇몇이 모여들었다 우리도 다시 길을 걸었다 장미는 늘 사랑을 보여 달라고 했다 큰 빛에 늘 가려져 있던 사랑을 어둠 속으로 보내야 했다, 작게 빛났다 어둠 속에서 사랑은 작게 빛나고 있었다 2020. 2. 3. 속 없는 밤 식탁 위에 밤이 한 가득이다. 마을 지천에 밤나무가 가득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식탁의 밤은 줄지 않았다. 주로 동생이 밤을 주워왔고, 아이는 그 밤을 싫어했다. 가끔 식탁 위로 손이 갔지만 밤을 먹지는 않았다. 밤길에 집에 갈 때면 발밑에 밤이 곧잘 채였다. 밤을 새고, 세며, 조금씩 곪아간다. 읍내가 멀어 시간 감각이 없어지곤 했다. 해지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엄마가 왔다. 결국 밤은 익어버렸고 아이는 먹을 수 없었다. 밤송이를 가를 때는 늘 손을 조심해야 한다. 동생은 아이의 손에 난 피를 보며 가르치려 들었다. 잎사귀에 둘러싸여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들어갈 수가 없다. 아이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불안해져 버린다. 밤은 여전했고, 그 날은 밤이 줄지 않았다. 2019. 11. 20. 학생의 학생 학생 하나는 말이 없었다. 학생 둘은 질문이 많았다. 학생 셋은 늘상 졸고 있었다. 학생 넷은 책 속에 책이 있었다. 학생 다섯은 사탕과 초콜릿의 노예였다. 학생 여섯은 주변을 조용히 시키며 떠들어댔다. 학생 일곱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고 숨기고 있었다. 학생 여덟은 앞을 보며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눈다. 학생의 학생은 배우고, 배우고, 배웠다. 2019. 11. 20. 대화 하지 마/ 왜 / 원래 그런 거야 원래 왜 그래 / 원래 그랬으니까 원래 왜 그랬는데 / 그 전부터 쭉 그랬으니까 그전부터 왜 쭉 그랬는데 / 사람들이 그렇게 하자고 했으니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 좋으니까 그렇게 하면 서로 왜 좋은데 / 서로 피해를 안 주니까 자기도 이득이 없잖아 / 대신 남도 이득을 못 보지 아무도 이득이 못 보는 게 좋은 거야? / 피해를 보는 것 보다는 낫지 그럼 나는 엄마한테 이득이야? / 이득이지 내가 남들한테는 피해를 줘? /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왜 낳기로 한 거야? / 엄마가 좋으니까 아빠도 좋다고 했어? / 당연하지 그럼 나는 피해를 입겠네 / 왜? 엄마 아빠 둘 다 이득이라며 / 그런데 그럼 나는 손해를 보지 / 왜? 엄마가 그런.. 2019. 11. 20. 이전 1 ··· 4 5 6 7 8 9 10 ··· 29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