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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나의 시

하기 전에 싫다 아침이다 눈은 떴지만, 여전히 뒤척인다 일어나기가 싫다 오늘 하루 펼쳐질 고단한 삶이 오늘 하루의 시작과 함께 마중 나온 것 같다 그 여정을 온전히 감내하지 못할까 두려워 일어나지도 않은 채 일어나기를 싫어한다 어떤 일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가 그려진다 그럴 때면 그 일들이 두려워져서 시작조차 못 하곤했다 공부가 그랬고, 사랑이 그랬다 난 결과를 몰랐지만 무수히 많은 실패를 목격했고 수없이 조언을 들으며 그들의 두려움을 행동 지침으로 삼았다 난 실패가 싫었고, 실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무서웠고, 실패한 후 실패자가 된다는 것도 싫었다 성공보다는 실패하지 않는 삶, 실패하지 않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지만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고백은 했지만, 상처는 적었다 나는 성공적으로 방어.. 더보기
호랑이의 추억 노력보단 재능, 재능보단 운의 문제이다 내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직설적으로 내 입맛의 변덕과 같은 그런 문제이다 쑥은 어릴 때 할머니가 곧잘 따서 주셨다 소화제라고, 그때도 나는 먹는 척만 하며 입안에 한참 머금다가 나중에 뱉어냈다 할머니는 등을 토닥여주시며 그래도 먹어봐, 하셨다 가끔 배가 고파 정신없이 먹다 보면 조금은 쑥이든 마늘이든 입안으로 들어갔겠지 그래도 그건 역시 운의 문제였다 대체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컸고, 그들은 작았다 그들은 무방비였고, 나는 무기가 있었다 나는 먹었고, 그들은 먹혔다 결국 나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서야 내 운이 다했음을 알아버렸다 더보기
두 개의 방 서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지만, 상황이.. 세상은 복잡하고 사람은 다양하다고, 미처 생각지 못한, 오해가, 감정적으로, 텅 빈 방이 쪼그라든다 반대편에선 가득 찬 방이 점점 커져왔다 방이 겹쳐지며, 빈 방의 경계가 흐려졌다 오해가 풀렸다고 말했다 정말 이해한다고 말했다 빈 방의 주인은 사지를 움츠리며 자물쇠를 채웠다 더보기
낙엽 떨어지는 소리 날이 혹독했다 조금 일렀지만 우수수 떨어진다 피부는 갈라지고 손에 힘이 빠져 놓아버렸다 이별의 감각은 계절의 변화처럼 조용히, 그리고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동네는 조용했다 한 잎 한 잎 세어보다 휙 지나가는 바람에 다시 우르르, 한꺼번에 떠나간다 폭우가 내리던 날의 소란도, 뒤이은 번갯불의 화려함도 없이 그저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이별의 순간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낙엽을 밟으며 뿌리를 쳐다본다 더보기
꽃샘추위 3월은 가장 추운 계절이다 삼일절과 함께 난방과 온수는 사라졌고 봄 햇살에 들뜬 사람들의 기대 속으로 시베리아 고기압은 칼끝을 찔러왔다 몇몇이 죽어나갔다 얼음은 아직 땅속에 남아있었다 서둘러 핀 꽃들이 이내 옷을 접었다 벌들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향기는 아직 필요 없었다. 몇몇은 폐 속에 고드름이 맺혀 죽어나갔다 땅 속에서 썩은 냄새가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 봄비 속으로 세균들이 흘러내렸다 아직 새벽은 검고 해는 없었다 더보기
제목기(除木器) 거실이 좁아 나무를 벴다 아버지는 어둡다며 형광등을 갈아끼웠다. 집은 껍질을 태워간다. 불이 다시 하나둘 켜졌다가 이내 꺼졌다. 저녁을 준비하던 어머니는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맛이 예전만 못하다며 아버지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베란다에서는 봄꽃이 멀리가지 못하고 수근거렸다. 몇몇은 올해 농사가 이미 망했다고 느낀다. 잎사귀는 그래도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산소가 방안에 조금 퍼진다. 거실 마루가 너무 딱딱하여 서있기가 힘들다. 천장의 밝기가 수시로 변하여 밤낮이 헷갈린다. 밤이 지속되어 모두가 잠에 빠졌다. 작은 새싹은 마루 틈새에 깨어있었다 더보기
작은 빛 여우에게 듣고서야 장미가 보였다 침묵은 잔잔한 물결을 드러내 보였고 아껴두었던 단어가 자리를 잡았다 희미한 빛을 따라 길을 걷는다 너무 밝은 빛은 피해야한다 간혹 빛이 빛에 지워졌다 메마른 사막에서 친구는 명확했다 매서운 바람에 언덕이 밀리고 다음 날이면 새로운 세상을 맞았다 기뻤다.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것이 무엇이든 삶은 소중해졌고, 짝은 여전히 모래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 풀이 돋아났다, 곧 몇몇이 모여들었다 우리도 다시 길을 걸었다 장미는 늘 사랑을 보여 달라고 했다 큰 빛에 늘 가려져 있던 사랑을 어둠 속으로 보내야 했다, 작게 빛났다 어둠 속에서 사랑은 작게 빛나고 있었다 더보기
속 없는 밤 식탁 위에 밤이 한 가득이다. 마을 지천에 밤나무가 가득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식탁의 밤은 줄지 않았다. 주로 동생이 밤을 주워왔고, 아이는 그 밤을 싫어했다. 가끔 식탁 위로 손이 갔지만 밤을 먹지는 않았다. 밤길에 집에 갈 때면 발밑에 밤이 곧잘 채였다. 밤을 새고, 세며, 조금씩 곪아간다. 읍내가 멀어 시간 감각이 없어지곤 했다. 해지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엄마가 왔다. 결국 밤은 익어버렸고 아이는 먹을 수 없었다. 밤송이를 가를 때는 늘 손을 조심해야 한다. 동생은 아이의 손에 난 피를 보며 가르치려 들었다. 잎사귀에 둘러싸여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들어갈 수가 없다. 아이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불안해져 버린다. 밤은 여전했고, 그 날은 밤이 줄지 않았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