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화265 연두에 울다_나희덕 떨리는 손으로 풀죽인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눈에 밀어넣었다 연두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동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 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 현실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 2025. 3. 27. 이별이 나를 끌고 갔다 이별이 그리 갑작스럽게 오지는 않는다저녁밥을 차리시는 어머니를 자연스레 느끼듯이이별도 오기 전에 슬그머니 자신의 향을 내비쳤다코를 막거나 더 진한 향기로 감춰보려 하지만그럴수록 다시 느껴지는 이별의 향은 한층 진해지기만 했다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나의 시간을 멈췄지만, 다른 이의 시간은 오히려 빠르게 감아버렸다.나는 더이상 외면할 수 없어 뱉어냈다웃는 얼굴 뒤쪽에 숨어있던 검은 마음을,하나도 포장하지 않은 채 그 검은빛을 그대로토해냈다, 차라리 더럽혀지고 싶다는 마음으로아름답던 날들을 덮어버렸다오염된 토양에 풀이 자라지 못하듯이다시는 너를 마음에 심지않겠다고 외쳤다천천히 풍겨오기만 하던 이별은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내 손을 잡았다이별은 그녀가 아니라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나는 열심히 발버둥을 쳐봤지만.. 2024. 11. 26. 택배 상자 -너는 쓰임이 남아 있는가분리수거장에 쌓인 상자들이 물어왔다 -너는 여전히 뜯지 않은 상태인가너덜너덜 매달린 박스 테이프가 조롱했다 차곡차곡차곡차곡말라 비틀어진 채 쌓여가는 시체들이너는 다를 것 같으냐, 물어왔다 나는 상자 하나를 꺼내든다-너는 죽지 않았다 나는 상자를 접어 가능성을 만들었다-너는 아직 무언가를 품을 수 있다 빈 공간은 소중한 물건으로 채워지고나는 혹여 새어나갈까 진득하게 입을 닫았다 받는 사람, 아직 쓰임이 남은 나보내는 사람, 여전히 나를 믿고 있는 너 택배가 상자에 담겨 보내졌다 * 제 39회 새얼백일장 낙방작 2024. 10. 10. 딱히 시라고 쓴 건 아니다 내 마음 속에 돌고 도는 문장이 있어 갑자기 끄적여본다. 다만 내 감정조차 갈무리 못하는 주제에 뭐라고 세상을 논하겠나. 그러니 이건 시가 아니다.하지만 다른 뭣도 아니기에 시라도 되는 양 보이도록 연을 나눠본다. 행과 행 사이에 뭐가 있든 어차피 읽어줄 사람 없기에 행간을 다시 행에 숨겨놓고, 행간에 다시 행을 구겨 넣어버렸다. 그러니 이미 시는 아닌데 행도 있고 연도 있으니 그야말로 나와 같은 무언가가 아닌가.뒤숭숭한 마음 뱉어내려고 고상한 단어 몇 개 갖다놔봤자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하고, 오히려 시 같지도 않은 문장 하나하나에 머리까지 복잡해지는 형국이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손이 가는 대로 훈민정음을 블록처럼 쌓는 것이다.세살배기 아기의 놀이 같은 문장 쌓기에 어른들이 달려들어서 잘했네,.. 2024. 10. 7.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책을 다 읽고, 제목을 왜 저렇게 달았을까 한참 고민했다. 작품 뒤편에 나온 원작 제목은 '에세이 인 러브'였던가, 아무튼 저런 제목과는 좀 무관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 세 문장의 차이가 뭘까? 왜를 아무데나 붙여도 말이 되는 한글의 우수함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나는 왜 제목을 저렇게 만들었을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세 번째부터 시작해보자.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은 사랑의 이유에 초점이 있다. 즉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맞는데,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랑의 이유는 없다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끊임없이 이유를 묻고 찾기 마련이며, 그 과정이 사랑을.. 2024. 9. 12. [소설] 이 중 하나는 거짓말 대학 때 술자리에서 거짓말 게임을 종종 했다. 종종한 이유는 우리에게 거짓말이 필요한, 더 정확히 말하면 거짓말 속에 진실을 담을 필요가 있는 순간이 종종 찾아왔기 때문이다. 다섯개의 진술 중 거짓말은 하나 뿐이었지만 우리는 그 하나의 거짓에 기대 많은 진실을 고해성사하듯 토해냈었다. 작가님도 나와 같은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쉽게 거짓말하는 사람이 싫다고 표현하지만 은연 중에 그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않을까. 많은 경우 거짓말은 상대를 속이기보다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사용되는 것 같다. 진실을 목도한 상대방의 분노로부터 나를 보호하기위해. 그런 면에서 거짓말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 '솔직히 말하면 다 이해해줄게.' 같은 말이야 말로 가장 큰 거짓말일 수 있다. .. 2024. 9. 8. 이전 1 2 3 4 ··· 45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