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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265

화재 건조한 날이었다스파크가 튀고 불이 났다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사람들이 동분서주했지만사람의 날숨으로도 불은 거세졌다발화점이 어디인지 살펴보지만흐릿한 불길 속에 화마(火魔)만이 춤춘다 검은 연기에 하늘은 어두워졌지만지상에서는 환한 불빛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불길 너머는 보일 듯 보이지 않았고불길과 하늘은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았다사람들은 이제 그저 그 부분이 안타까웠다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잔치가 끝나갔다허탈한 눈빛 속에서도 붉은빛은 끝까지마지막 한 모금을 버리지 않았다 신난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어른들은 아이의 눈으로 잿더미를 바라본다 2024. 5. 28.
수컷은 꼬리를 흔들었다 수컷은 꼬리를 흔들었다 좋아서, 그리고 반가워서 머리를 들이밀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애타는 몸짓에 그는 마음으로 답했다 혈관을 타고 그의 마음이 퍼져나갔다 배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너무 좋았다 수컷은 보통 할 일이 없었기에 그와의 재회를 자주 생각했다 그가 들어오고 그를 바라보고 그도 바라보고 그와 접촉하는 그 순간의 황홀함이 너무 좋았다 사방이 막힌 사각형 속에서 쉬지 않고 원을 그리며 추억하고, 기대하고, 미래를 그렸다. 그가 돌아올 시간은 몰랐지만 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기에 그 순간만 기다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다행히 오늘도 문이 열렸다 2024. 4. 24.
반영 반영 떠나왔다 멀어지면 잊힐 거라고 스스로는 잊지 못한 채 그렇게 떠나왔다 돌아오는 계절은 늘 지나간 계절을 휘적거리며 지나갔다 너와 난 반대야 반대도 필요 없는 반대야 동의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함께 할 수도 없었다 지구는 떠나지 못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지구 반대편 너의 발밑에서 뒤집힌 채 살아가기로 한다 우리는 서로의 어둠일까 수평선에 선을 그어본다 넘어오지 말라, 중얼거려 본다 실체 없는 파도는 부지런히 실체가 떠난 발자국을 지워갔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도 나는 그저 선을 감시하고 파도는 발자국을 지우고 배는 들락날락거렸다 어둠이 완전히 내릴 때까지도 2024. 4. 2.
걷다 걷다 나는 독하지도 않고, 모질지도 못한 사람이라 뒤처지고 지워지기 쉬운 사람이다 날지도, 뛰지도 못하는 나는 그저 두 다리가 멀쩡하여 걸어가는, 살아가는 사람이다 김장 날에 팔을 걷어붙이고 명절이면 눈꺼풀을 걷어 올리며 그저 그런 소소한 일들을 그보다 더 소소하게 해결하는 손도 작고 발도 작은 사람이다 싹싹한 미소를 얼굴에 걸어두고 매일매일 초등학교를 드나들며 아들 손을 잡고 집주변을 거니는 걸음이 가벼운 사람이다 걷다가 아름다운 꽃이라도 발견하면 아들과 쪼그리고 앉아 한참 걸음을 멈추기도 하는 빈틈이 있는 삶이다 * 제38회 새얼백일장 차상 수상작 2023. 12. 9.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운명일거다 내가 여전히 파란 하늘 밑에 누워 그때를, 그때의 너를 추억하듯이 너 또한 하얀 구름에서 나를 그리고, 나의 모습을 찾고 나와의 재회를 기다리겠지 바람이 불어 가지가 흔들리듯이 비 오는 날 구름이 안 보이듯이 원인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날, 그날의 날 찾아 안아주던 넌 운명일 수밖에 없다 하얀 배경에 점을 찍듯 또렷한 초점으로 널 여전히 바라보는 나 하늘의 색이 바뀌고 떨어질 잎이 없어져도 많은 일들이 시간에 묻혀가는 그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나는 운명의 선택이다 2023. 11. 25.
지각(遲刻) 없는 지각(地殼) 지각(遲刻) 없는 지각(地殼) 힘껏 달려왔지만 도착한 곳에 내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는 타인을 모든 타인이 경계한다 ‘여긴 안 돼’ 소리는 없었지만 확실한 외침 그 기류에 대기가 움직이고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었다 한발 늦은 나는 밤이 될 때까지 얼굴의 물을 닦으며 서 있었다 얼른 어둠이 내 모습을 감춰주기를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진부한 질문을 별에게 던져본다 ‘내 자리는 어디일까’ 대답 못 할 달에게 하소연한다 드러누운 내 뒤쪽으로 지구가 속삭인다 ‘넌 지금 어디에 있니’ 202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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