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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

기차 여자는 오늘도 힘들다고 했다.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그 말에 신경이 쓰여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어디니, 뭐 했니, 어디 갈 거니, 뭐 할 거니 장소는 목적에 달라붙어 기차놀이를 한다. 칙, 다음에 칙. 폭, 다음에 폭 우리 아이도 제시간에 기차를 탔을까 인생에는 늘 다음 열차가 있다는 믿음을 떠나는 기차를 보면서도 납득 할 수 있을까 여자는 더 이상 차표가 없어 아이의 기차를 타고 있는 것일까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 잘했어, 잘했어 늘 같은 소리의 익숙함에 잠시 마음이 놓인다. 더보기
미소 파도가 밀려온다 첫번째 파도는 첫번째 바람이 만들고 두번째 파도는 두번째 바람이 만들었다 세번째 파도는 정어리떼가 만들고 네번째 파도는 오징어배가 만들었다 다섯번째는 요란하게 몸을 뒤틀었다 첫번째 파도가 열 개의 돌맹이를 밀어낸다 두번째 파도는 백 개의 모래를 걷어냈다 세번째 파도는 조개의 입으로 들어가고 네번째 파도는 꽃게의 배에서 나온다 다섯번째는 살 속의 진주 열 개를 만났다 떠밀려온 파도는 울다가 결국 웃어버렸다 더보기
[책] 임계장 이야기 "나는 퇴직 후 얻은 일터에서 '임계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임계장은 '고다자'라 불리기도 한다.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쉽다고 해서 붙은 말이다. 고용주들에게 이 고다자 임계장들은 시급만 계산해 주면 다른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매력적인 노동력이다." - 임계장 이야기 p.7, 조정진 나는 책을 읽을 때 맨 처음에 나오는 작가의 말을 열심히 읽는 편이다. 독자들에게 정성스럽게 써내려 간 작가의 말을 보고 나면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조금 더 증가하고, 책의 전반적인 목적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계장 이야기'의 경우는 작가의 말을 보고 조금 망설여졌다. 이 책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너무 명확했고,.. 더보기
입수 하루쯤 떠나고 싶다 이틀은 부담스럽고, 오후 반나절에서 다음날 새벽 정도까지가 좋겠다 떠날 때 돌아올 길을 생각하지 않고 돌아올 때도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가벼운, 최대한 무감각한 하루가 좋겠다 환청처럼 들리는 다급한 소리, 울음 소리, 먼 한숨 소리 모두 소라 껍질 속에 가둬버리고 메아리가 메아리가 되는 현실 속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 굽은 허리와 처진 어깨도 쉬어라, 일어날 필요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중력에 기대자 누워서 뒹굴거리다 보면 목적지는 온다 그때 잠시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보자 조용하고 어중간한 바다 속에서 그냥 하루만 머물다 돌아가자 더보기
봉선화 더보기
동행 아빠가 너무 빨랐다 성큼성큼 무심한 발걸음을 쫒아가느라 내 발은 쉴 새 없이 구르고 뒤뚱거렸다 ‘아빠’ 조금만 천천히 가라는 의미이다 ‘어서와’ 나보고 더 빨리 오란다 다시 폴짝폴짝 날듯이 뛰어보지만 이내 다리가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서러운 마음에 엉엉 울고 있는데 아빠는 ‘뛰다보면 넘어지기도 하는 거야’ 하며 염장을 질렀다 나는 재촉하는 아빠의 팔을 뿌리치며 얼마 전까지 먹던 젖이 다시 튀어나올 만큼 더 크고 우렁차게 최대한 울음을 쥐어짰다 아빠는 결국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아빠, 빨리 가면 더 힘들 수도 있는 거야 더보기
술 취한 새벽, 마누라는 죽어났다 새벽인 것 같다 아직 덜 깬 몸을 억지로 비틀며 타들어 가는 목구멍을 적시기 위해 일어난다 간밤에 몇 차까지 갔더라,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취할 때까지 미루고 미루다 결국 얘기했던가 내일 물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가 성질을 내면서 말했던가 온갖 생각이 물 한잔에 섞여 뇌로 흘러들었다 다시 자야지, 머리를 흔들며 소파로 간다 마누라가 나 죽지 말라고 이불을 던져줬구나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구부정하게 누웠다 잠이 들락 말락, 문이 열렸다-닫혔다 어제 술자리에서 본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와중에 끼익- 조심스러운 소리와 함께 잠이 멀어진다 마누라는 살금살금 나와 젖병을 타고 다시 살금살금 애가 깼나보다, 힘들겠네 걱정은 잠시, 다시 얼굴들이 떠다니고 문이 열렸다-닫혔다 하는데 끼익- 문이.. 더보기
아빠 아빠 아들이 부른다 아빠, 아빠 아빠 소리가 좋아서 괜히 딴청을 피웠다 아빠, 아빠, 아빠 아들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스며들고 그제야 고개를 돌려 묻는다 응, 무슨 일이야? 아들은 다시 장난감 자동차를 운전했다 왜 불렀어, 볼에 뽀뽀하며 물어보지만 아들은 내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며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아빠를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았다 옆에 있으면 되었다 아빠가 나를 보고 있으면 되었다 등 뒤에서 내 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길이 울퉁불퉁하지는 않은지 그런 것들을 유심히 지켜보면 되었다 나는 아빠가 심심하지 않게 그저 열심히 뛰어놀면 되는 것이다 운전 중이었다 아빠가 여전히 뒤에서 말했다 조심히 운전해라 나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알아서 할게요 너무 무신경한 대답에 스스로 놀라 슬쩍 거울을 봤다 아빠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