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화/나의 시172 이별이 나를 끌고 갔다 이별이 그리 갑작스럽게 오지는 않는다저녁밥을 차리시는 어머니를 자연스레 느끼듯이이별도 오기 전에 슬그머니 자신의 향을 내비쳤다코를 막거나 더 진한 향기로 감춰보려 하지만그럴수록 다시 느껴지는 이별의 향은 한층 진해지기만 했다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나의 시간을 멈췄지만, 다른 이의 시간은 오히려 빠르게 감아버렸다.나는 더이상 외면할 수 없어 뱉어냈다웃는 얼굴 뒤쪽에 숨어있던 검은 마음을,하나도 포장하지 않은 채 그 검은빛을 그대로토해냈다, 차라리 더럽혀지고 싶다는 마음으로아름답던 날들을 덮어버렸다오염된 토양에 풀이 자라지 못하듯이다시는 너를 마음에 심지않겠다고 외쳤다천천히 풍겨오기만 하던 이별은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내 손을 잡았다이별은 그녀가 아니라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나는 열심히 발버둥을 쳐봤지만.. 2024. 11. 26. 택배 상자 -너는 쓰임이 남아 있는가분리수거장에 쌓인 상자들이 물어왔다 -너는 여전히 뜯지 않은 상태인가너덜너덜 매달린 박스 테이프가 조롱했다 차곡차곡차곡차곡말라 비틀어진 채 쌓여가는 시체들이너는 다를 것 같으냐, 물어왔다 나는 상자 하나를 꺼내든다-너는 죽지 않았다 나는 상자를 접어 가능성을 만들었다-너는 아직 무언가를 품을 수 있다 빈 공간은 소중한 물건으로 채워지고나는 혹여 새어나갈까 진득하게 입을 닫았다 받는 사람, 아직 쓰임이 남은 나보내는 사람, 여전히 나를 믿고 있는 너 택배가 상자에 담겨 보내졌다 * 제 39회 새얼백일장 낙방작 2024. 10. 10. 딱히 시라고 쓴 건 아니다 내 마음 속에 돌고 도는 문장이 있어 갑자기 끄적여본다. 다만 내 감정조차 갈무리 못하는 주제에 뭐라고 세상을 논하겠나. 그러니 이건 시가 아니다.하지만 다른 뭣도 아니기에 시라도 되는 양 보이도록 연을 나눠본다. 행과 행 사이에 뭐가 있든 어차피 읽어줄 사람 없기에 행간을 다시 행에 숨겨놓고, 행간에 다시 행을 구겨 넣어버렸다. 그러니 이미 시는 아닌데 행도 있고 연도 있으니 그야말로 나와 같은 무언가가 아닌가.뒤숭숭한 마음 뱉어내려고 고상한 단어 몇 개 갖다놔봤자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하고, 오히려 시 같지도 않은 문장 하나하나에 머리까지 복잡해지는 형국이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손이 가는 대로 훈민정음을 블록처럼 쌓는 것이다.세살배기 아기의 놀이 같은 문장 쌓기에 어른들이 달려들어서 잘했네,.. 2024. 10. 7. 세상에 그런 사람 많아요 굳이 당신이 싫어하고주변에도 그리 떳떳하지 못한 일을 강행하면서 자신에 대한 이해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만나면 만날수록 당신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그런 사람말고당신을 배려하고당신의 염려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애초에 근심 걱정하는 상황을 만들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충분히 자기 일 잘하고좋은 사람들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늘 당신을 우선 순위에 두는 사람그런 사람 세상에 많아요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이제 그만 걱정하세요내려놓고 풀어주세요, 그 사람의 길은 그 사람이 가겠죠내 길을 틀어서까지 같이 걸어갈 필요는 없어요그냥 비슷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과 함께 가세요그래야 당신이 넘어졌을때 손이라도 잡아주겠죠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당신같은 사람도 세상에 많아요 2024. 7. 28. 뇌우 한창 달아오르던 아스팔트 위로 빗물이 떨어졌다. 달궈진 불판 위로 물이 떨어진 것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하늘이 어두워졌고 사람들도 잠시 멈춰 섰다. 도시 곳곳에 생겨난 연못에 절반의 어둠이 갇히고, 난 절반의 희망을 꺼내어 참방참방 연못 위를 달려본다. 떨어지는 물방울과 흩날리는 물방울들이 부딪혀 더욱 잘게 흩어졌다. 구름은 강아지처럼 으르렁대며 마음을 숨겨보지만, 진득해진 감정이 기름때처럼 번들거리며 물방울에 맺혀있었다.비가 그쳤다. 모든 것을 삼킬 것 같던 물줄기는 되려 도시에 삼켜지고 사람들 속에 스며들었다. 구름은 도망간 것인지 사라진 것인지 보이지 않고, 뒤늦게 달아오르는 아스팔트 위에서 나는 내 위치를 다시 살펴본다. 얼마나 떠내려온 것인가. 태양 빛이 창문에 반사되어 수십 개의 조명이 .. 2024. 6. 17. 사랑이 지층처럼 쌓여있었다 거대한 지층이 마침내 드러났다더 이상 수면 아래 잠들어 있기엔너무 커져 버린 마음이었다 한때 높은 산 위의단단한 암석 같았던 마음이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지며지금은 그저 누군가를 감싸 안고 싶은 작은 알갱이가 되어 있었다 이미 굳어 버린 줄 알았던나의 마음은 너의 세심한 말과사랑스러운 몸짓에 조금씩 깎여나갔고결국 나의 바다에 지층처럼 쌓여갔다 언제부터 사랑했을까 산에 비가 내리던 날이었을까그 비가 모여 강이 된 날이었을까그 강물이 바다로 흘러 가지고 있던모든 마음을 던져버린 날이었을까 언제인지는 몰라도 사랑은 지층처럼 쌓여 나를 들어 올렸다 나는 줄무늬로 남아버린 아픔들과화석처럼 새겨진 쓰린 기억 속에서다시 한번 걸음을 망설이지만척박한 줄 알았던 그 땅 위에선이미 한가득 꽃이 피어 웃고 있었다 2024. 6. 10. 이전 1 2 3 4 ··· 29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