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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265

멸종 멸종 흔히 그렇듯 그는 느껴지지 않게 존재했다 인식은 선택적으로 그를 지웠고 그의 숨소리는 가끔 어떤 향에 섞인 채 발소리를 내곤 했다 누군가 그를 회상시키면 잠시 수면 위로 떠오른 심해 생물의 그림자처럼 진하게, 하지만 희미하게 다시 사라져 갔다 시작이 언제인지 모르는 만큼 마지막도 경계가 흐릿했고 비가 쏟아지는 날의 구름처럼 존재감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다시 사라졌다 사람들이 그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의 발자국, 숨소리, 노폐물까지 그를 본 사람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신은 그를 보았는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도 고개를 저었다 2023. 10. 17.
해를 넘어가는 지구 해를 넘어가는 지구 올해도 지구가 태양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새로운 만남과 이별의 도화선이 폭죽에 불을 붙이고 전 세계에서 터지는 샴페인에 지구는 잠시 후회했지만 사람들과 눈물과 웃음이 모두 뒤섞이고 엉켜있어 당최 말을 걸 수 없었다 울다가 웃고 다시 심각해지고 아직 흘러가지도 않은 시간에 휘둘리는 사람들 지구는 그냥 더 빨리 돌고 싶었지만 늘 그랬듯 정해진 하루의 양만 채울 수 있었다 늘 멈춰있는 태양을 새삼스레 새롭게 바라보는 그날, 그 요란함을 지구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새 해는 없는데 태양 주변을 한 바퀴 돌 때마다 갑자기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사람들을 보며 지구는 더욱 빠르게 자전하고 싶었다 그냥 다 우주로 날려버리고 빠르게 회전하는 발레리나처럼 혼자 우아하게 돌며, 우주를 누비고 싶었다 하지만.. 2023. 10. 16.
교사의 동력 교사의 동력 아름답구나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네가 대단하구나 결실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도 노력을 그치지 않는 네가 고맙구나 그 사려 깊은 마음으로 내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해 줘서 힘내야겠구나 앞으로도 마주할 너와 같은 희망을 위해 2023. 10. 16.
벗은 머리 벗은 머리 오늘도 머리카락이 빠졌다 새로 돋아나기 위한 빠짐이 아닌 그냥 원천적 이별에 가까운 빠짐이다 어릴 때는 곧게 뻗은 생머리가 풍성하다며 지나가는 이모들이 자주 쓰다듬어 주곤 했다 지금은 누구보다 내가 많이 쓰다듬지만 벌거벗겨진 기분 그건 옷이 벗겨질 때도 느끼지만 머리가 벗겨질 때 더 심하게 느껴진다 너무 일찍 달아난 젊음 멀어져가는 머리카락을 잡아보려 갖은 노력을 다 해봤지만 그 노력은 젊음과 더 멀어지게 했다 술도 못 마시는 약, 약, 약 약은 사람을 약해지게 하는 것이 맞다 숲에 기생충이 들었으면 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 맞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면 시원하게 밀어버리는 것도 맞다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이 없어진 지금에서야 얼굴이 산다 2023. 10. 16.
발아 발아 흩날리는 바람이 너의 머리를 쓰다듬고 푹신한 흙에 담겨 지친 몸을 씻어낸다 자연히 스며드는 공기의 내음 그 속에 묻어나는 그대의 기억 사랑은 땅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일까 땅속에서 떡잎이 고개를 내밀 듯 사랑도 늘 사랑의 대상을 찾아다닌다 운명처럼 맞닥뜨린 그대에게 사랑이 고개를 내밀면 그냥 흙을 어루만지듯 스며들어 보자 부드럽게 감싸 안는 뿌리털 뿌리털이 부드럽게 감싸오고 바람에 떠밀려 물방울이 모여든다 촉촉함과 끈적임 사이로 녹아드는 사랑 마주하지 않아도 함께 떠다니며 느끼는 행복 바람에 바람이 실려와 사랑이 피어난다 2023. 10. 16.
벚꽃이 지는 계절 안개에 덮힌 햇살이 물러가고 아침의 스산함마저 사라져버린 따뜻함 그런 진짜 봄이 오면 꽃잎은 살랑거리며 떨어진다 어떤 강함도 느껴지지 않는 딱딱함의 가장 반대편에 자리한 분홍빛 꽃잎들이 땅을 덮고, 다시 밟히며 봄길을 장식한다 벚꽃의 화려함에 이끌려 나온 사람들과 그 사람들 덕분에 생긴 따뜻함과 그 따뜻함 속에 피어나는 세상의 모든 동식물들 그리고 그 모든 걸 보지 못하고 져버린 꽃잎들 여리고 여려 세상을 바꾸는 꽃잎들 2023.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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