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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

기억 다리 밑에서 주웠어, 또 그 얘기다 왜 나의 출처는 상표처럼 붙어있지 않을까 당신을 닮아서 그래, 나는 아무도 닮지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이 공방은 끝이 없다 집 구석구석 찾아봤지만 백일 사진도, 돌 사진도 없었다 엄마는 어릴 때 집에 불이 났었다고, 그 때 사라졌다고 한다 그 어릴 때란 동생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인가, 하필 그 2년 간 왜이리 많은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모가 동생에게 말했다 엄마를 쏙 빼다 닮았네 고모가 동생에게 말했다 아빠 어릴 때랑 똑같네 동생은 별 관심이 없다 난 어디에서 전학을 왔을까 아빠가 이제 집에 가자고 하셨다 더보기
정원 가지 끝으로 갈수록 잎은 작아진다 과거가 더 또렷한 이미 늙어버린 자의 기억 세포처럼 새로움은 과거와 겹쳐진 일부로만 남았다 나무들의 높이가 모두 같았다 가끔 새 것이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었지만 곧 모두 잘려나갔다. 정원엔 늘 일정한 과거만이 허용되었다. 올해 새로 자라날 코스모스를 묻는다면 늘 그 자리에서 새로 피던 과거일 뿐이다 손님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변함없다고 걔 중에 나를 알던 이는 시선을 회피할 뿐 아무도 나의 변화를 언급하지 않았다 계절의 반복은 늘 일정한 시련이다 정원은 그 흐름 속에서도 정확한 기억을 떠올려야 했고, 시험은 계속 반복되었다 향나무가 죽고, 연못의 물이 사라질 때까지 정원은 새순을 허락하지 않았다 더보기
그래서 웃는다 늘 바란다 사람들이 먼저 선의를 베푸는 목적 없는 선의가 세상을 떠돌다 메아리처럼 돌아와 내 아이들에게 속삭여 주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늘 묻는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던 체온이 누구의 것이었냐고 보다 더 오래 자리에 남아 다시 돌려줘야 하는 건 아니었냐고 혹시 알면서도 포기한 건 아니었냐고 그래서 웃는다 사라지지 않는 소리를 뱉는다 더보기
아들아 아들아 울지 마라 나는 그런 자격이 없다 애비라는 나는 네가 태어나던 순간에도 탄생의 축복에 기뻐하기보다 앞으로 포기해야할 저질 같은 욕망들의 개수를 세며 내 지갑의 잔고를 비벼보았다 너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조금씩 넓혔던 집 평수와 자동차도 뒤이은 불행이 닥치면 쉬이 너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네가 대학에 떨어지던 해, 가장 슬펐던 건 네가 이루지 못한 꿈 때문이 아니라 내가 포기해야할 작은 욕망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들아, 울지 마라. 어차피 나는 그 눈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 저 쉼 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피 같은 돈을 쓰지 마라 하루에 그 녀석이 몇 번을 다녀가도 여전히 나는 망쳐버린 인생이다 아들아, 이제 그만 나를 보내고 잊은 채 살아가라 더보기
취객(醉客) 왜 그랬냐, 물으면 늘 취해서라고 답했다 그런 종류의 변명은 다음이 없어 편안함을 느꼈다 그날도 취해있었다 영수증은 바로 찢어버리고 무엇을 묻든 그러려니 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날을 불살랐다 분명 불타고 있었다 속부터 겉까지 검게 변해가며 연료가 모자랄까 급히 알코올을 들이 부었다 옷을 잡아끄는 것들이 버거워 벗어버리고 부끄러움도 지워버리고 결국 아침은 찾아왔고 눈 속에 들어온 어색함만큼 커다란 짐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흩어져 희미해진 자아를 파고드는 물음 속에 해줄 말은 역시 취해서였다 혹여 알코올이 날아갈까 입을 틀어막았다 더보기
결혼은 해야지 -결혼은 해야지 마치 처음 꺼내는 듯 툭 던져지는 교묘함 -밥은 먹어야지 댐을 손가락으로 막는다 야지의 사령관은 늘 최소한의 문제인 양 ‘그래도’와 함께 공부는 해야지 학원은 가야지 대학은-취직은 야지야지 신호를 보냈다 수많은 폭격 속에서도 난 늘 ‘말아야지’ 진지를 구축하고 경계를 서고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때론 암구호를 모르는 병사처럼 묻지마 저항을 했지만 결국 사령관님은 징계처리 실상 ‘해야지’는 ‘말아야지’를 동시에 수반한 명령이라 난 가끔 내 진지가 어느 쪽인지 햇갈려 엉뚱한 곳에 포탄을 날리기도 했다 역시나 징계처리 평온한 가정은 훌륭한 식사에서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일단 밥부터 먹어야지 더보기
혈흔 길게 늘어진 자국이 인생에 비해 너무 짧다 어린 시절의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끝을 보지 못한 습작이 내는 비릿한 젖은 향이 올라온다. 붉은 그림이 그리는 선을 따라 하얀 뱃길이 열렸다 건너갈 수 없는 이들이 열을 지어 소리친다. 문득 그날의 소리가 들렸다. 새벽의 침묵 속에 비틀려 들어가던 나사 박는 소리 폭포를 타고 오르던 빗방울 소리 오래된 신발을 끄는 듯 무정한 소리 숯 보다는 화려하게 타고 싶었다. 그러곤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누가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혈관이 모두 터져나갈 때까지 깨어있고 싶었다 더보기
[책]아몬드_손원평, 창비 아몬드 국내도서 저자 : 손원평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7.03.31 상세보기 "한국형 영어덜트 소설의 탄생" 책의 뒷편 크게 적힌 소개 글이다. 영어덜트 소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포털에서 검색해보니 지식백과 패션전문자료사전에 딱 하나가 나왔다. 소비자를 연령별로 세분화시킨 경우, 보통 22~25세까지의 사람들 - 네이버 지식백과 음.. 저런 뜻으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아무튼 좀 어색한 단어다. 짐작하기론 청소년과 성인이 모두 읽기 좋은 책이라는 뜻인 것 같기도 하고, 소년이 성인이 되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자. 소설의 시점 소설은 주인공인 나(윤재)의 관점에서 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