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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나의 시172

밤엔 창밖이 보이지 않는다 그 테이블에 처음부터 혼자 있던 것은 아니었다.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갔고 나의 자리가 그 곳 말고는따로 없었기에 어찌 보면 자연스런 결과였다굳이 둘러보면 더욱 내 자리가 초라해질까담담한 척 정면의 빈자리만 응시한다어느새 어두워진 창밖은 보이지 않았고 덩그러니 앉아있는 내 모습만 창에 남아있었다즐거운 소란의 늪에 빠져 고요해져 버렸다.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 필요한 상태였다침묵 속에 공기가 빠져 숨이 막혀왔다울그락푸르락 무언가 들끓어 올라 손발이 통제되지 않는다그 순간, 뜨거운 기운이 테이블 전체를 감싸고 솟아올랐다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휴지들과 잔 속에 버려진 소주들이 날아올랐다 무게감이 사라지고 발밑으로 숙소가 보인다창속에는 여전히 낯선 즐거움이 넘쳐흘렀지만더 이상 내 발목을 휘감지는 못했다별빛을 .. 2018. 12. 15.
낯과 방 고개를 넘자 산 속에 둘러싸인 마을이 보였다. 끝과 끝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작은 마을이다. 관광으로도 온 적 없던 외진 곳. 어렵사리 차를 세워두고 짐을 풀지 않은 채 걸었다 금방 둘러볼 수 있으리라 세탁소와 마트, 혼자 먹을 식당 정도만 봐두자 그런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무턱대고 인사를 한다 너희는 왜 나한테 인사를 하니 / 어른이잖아요, 누구세요 아, 이번에 새로 이사왔다 / 선생님이세요 그걸 어찌 알았니 / 딱 보면 알아요 유리창에 비친 나를 바라봤다 왠지 알 것도 같다 아이들은 우르르 가버렸다, 물어볼 새도 없이 나도 그렇게 교실을 나왔던가 세탁소는 없었고, 조그만 슈퍼는 문을 닫았다 몇몇 식당 앞에서 어슬렁 거렸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 곧 알게 되겠지 관사에는 세탁기가 없었다.. 2018. 10. 21.
침묵 어떤 소리도 없는 곳보다 하나의 소리만 존재할 때 보다 고요했다 보다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곧 눈을 감아버렸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야 중국에서는 아닌데요 숨을 삼켜 버렸다 공기는 계속 한 쪽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2018. 10. 15.
돌개구멍 뒷사람에게 떠밀려 앞으로 나아간다 방향을 정할 수가 없어 빈틈을 계속 메우길 반복했다 기둥에 가로막힌 인파에 가로막히기 전까지는 그래도 방향성은 있었다 갑작스런 벽에 부딪히고 또 밀쳐지며 결국 돌기 시작했고, 북쪽은 남쪽, 동쪽은 서쪽과 같아졌다. 기둥 주위로 사람들은 강강술래를 시작한 것이다 옆 사람을 잡고 또 잡으며 충돌을 회전으로 막아냈다 발과 발이 끌리고 밟히며 먼지가 일었지만 사람들은 그 어울림을 즐기고 있었다 바다로 향하던 마음을 중력과 함께 떠나버리고 소용돌이와 함께 조금씩 가라앉았다 분지 중앙에 노인이 주저앉는다 그 주위로 사람들이 돌고 돌며 멀어져 간다 2018. 10. 15.
f’(x)=0 지하철 노약자석에 왜 우리는 앉으면 안 돼요? 선생님은 왜 급식을 자유롭게 퍼서 먹어요? 점심시간에 왜 외출하면 안 돼요? 의미 없는 행사는 왜 그렇게 많이 해요? 도서관에 만화책은 왜 이렇게 적어요? 우리 학교는 왜 샌드위치 날에 안 쉬어요? 우리 학교는 왜 이렇게 방학이 짧아요? 수학여행은 가봤던 곳인데 왜 빠지면 안 돼요? 선생님 수업은 왜 이렇게 졸려요? 그냥 안하면 안 돼요? 선생님은 담배를 피우면서 왜 우리는 피지 말라고 하세요? 우리 학교 교복은 왜 이렇게 안 예뻐요? 급식은 왜 맨날 똑같은 게 나와요? 수업 언제 끝나요? 좀 쉬면 안 돼요? 2018. 10. 15.
출경을 앞두고 속았었지, 중국 땅은 넓으니까 바다를 건널 수도 있겠구나, 했었지 방향은 뭐, 더 올라갈 수도 없으니까 대충 무언가를 팔아야 하는 일이라고 했어 간단한 장신구나 채소 같은 거 집은 따로 없어도 공동숙소에서 자면 되고 크게 멀리 갈 일도 없으니 몇 년 고생하고 바짝 벌면 두만강이 보이는 곳에서 살려고 했지 그 정도면 어머니도 보고 동생도 보고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남조선으로 넘어온 건 도피였어 소문이 있었거든, 대사관으로 가면 한 숨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종착역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너무 오래 걸렸어 군인들은 한 시간이면 걸어갈 거리를 쳐다만 보며 산 세월이, 후회는 늘 끼고 살지 그래도 내년이면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니겠지 남조선도 별거 없다고 2018.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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