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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책과 영화

[책]아몬드_손원평, 창비

아몬드
국내도서
저자 : 손원평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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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형 영어덜트 소설의 탄생" 책의 뒷편 크게 적힌 소개 글이다. 

영어덜트 소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포털에서 검색해보니 지식백과 패션전문자료사전에 딱 하나가 나왔다. 

 

  소비자를 연령별로 세분화시킨 경우, 보통 22~25세까지의 사람들 - 네이버 지식백과

 

  음.. 저런 뜻으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아무튼 좀 어색한 단어다. 

  짐작하기론 청소년과 성인이 모두 읽기 좋은 책이라는 뜻인 것 같기도 하고, 소년이 성인이 되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자.


  소설의 시점

 

  소설은 주인공인 나(윤재)의 관점에서 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시점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알렉시티미아(감정표현불능증)'라는 특별한 질병을 가진 주인공의 내면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 1인칭이 적절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특수한 주인공 시점의 기술은 전혀 다른 두 가지 효과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감정이 없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관찰한 사실을 회고하듯이 진행하다보니 시점에 의해 발생하는 왜곡 없이 거의 3인칭 관찰자 시점 만큼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상황 속에서 감정을 느끼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더욱 안타깝게 여기게 되고, 주인공의 고립감을 극대화 시켜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선천적으로 크기가 작은 편도체(아몬드)

 

  주인공이 앓고 있는 병으로 설정한 알렉시티미아(감정표현불능증)는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데다 뇌 변연계와 전두엽 사이의 접촉이 원활하지 못해서 생긴 병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편도체를 '아몬드'라고 표현하는데 소설의 제목이 아몬드인 이유이다.

  나(윤재)는 공감 능력 부족과 감정 표현 부족으로 여러 곤란을 겪게 되는데 그 중 제일 처음 자신의 병을 알리기 위해 등장하는 상황을 짚어보자.

유치원 시절 골목에서 아이가 심하게 맞는 것을 보고 나(윤재)는 동네 슈퍼에 가서 아저씨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만 감정이 결여된 채 무덤덤하게 말하다보니 아저씨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나(윤재)가 거짓말을 한다고 판단해 버린다. 결국 제 시간에 도움을 받지 못한 아이는 죽어버렸고, 더 큰 문제는 그 아이가 그 동네 슈퍼 아저씨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저씨는 비겁하게도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의 방향을 나(윤재)에게로 돌렸고, 그럼에도 나(윤재)는 그 아저씨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한 채 그 상황을 이상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경찰서 안은 아저씨와 뒤늦게 나를 찾으러 온 엄마와의 말싸움으로 시끄러워졌지만, 여전히 나는 무감각하게 그 상황을 바라볼 뿐이다. 

  위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소설에서 나(윤재)는 감정을 공감하거나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가치를 저버린 싸이코패스는 아니다. 옳고 그른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알고, 그렇게 행동하고자 노력한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 보다 훨씬 정직하고 확실하게 실천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주변에서는 나(윤재)를 계속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업신여긴다. 결국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보다 어떤 사람인지가 주변 사람에게 더 중요하고, 그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나는 결국 여전히 혼자일 수 밖에 없다. 이 부분이 무척 슬프고, 교육적으로 시사하는 것이 큰 것 같다.


 

  가족

 

  어릴 때 주인공의 구세주는 단연 가족이었다. 엄마는 남편을 잃었지만 씩씩했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할머니는 대범하고 유머 감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주인공이 사회에 잘 어울리기 바랐으며, 실제적으로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그 중 엄마가 실시한 교육법이 인상적이다. 주인공에게 여러 상황을 가정해서 적절한 대응 방법을 직접 알려주는 교육이다.  

엄마는 색종이에 여러 개의 문장을 쓴 다음 커다란 전지에 그것들을 일일이 붙였다. 벽을 장식한 전지 위엔 이런 말들이 쓰여 있었다. 

  차가 가까이 온다 -> 몸을 피하거나, 가까워지면 뛴다

 사람이 다가온다 -> 부딪히지 않도록 한쪽으로 비켜선다

 상대방이 웃는다 -> 똑같이 미소를 짓는다

맨 밑에는 

※ 참고사항 : 표정의 경우, 무조건 상대와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편함

- 본문 33쪽

 주인공의 엄마는 거의 모든 상황을 주인공에게 알려주려 했지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그 대응 방법도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엄마의 방법은 주인공의 나이가 들수록 이런 변수들에 대응하지 못했고, 오히려 아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주인공은 "상대가 던지는 말 속에 담긴 '참 의미'와, 내가 하는 말에 담겨야 할 '바람직한 의도'까지도 함께 짝지어 외워야 했다." 하지만 엄마의 애달픔과는 별개로 주인공은 자신이 "미세한 단어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따위는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소설에서 등장한 엄마의 교육법은 사실 인간에 대한 풍자를 담았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교육법은 주인공의 나이가 들수록 사실 그 자체 보다는 그 이면에 집중하고, 사람 간의 진정한 관계 맺기 보다는 타인과 적절한 거리를 두며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 방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엄마가 보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이 일반적이고 무난한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인간 관계의 허무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인공과 사회의 통로 역할을 했던 가족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식사를 위해 외출했던 주인공과 할머니, 어머니에게 닥친 비극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단지 세상을 향해 강한 증오를 가진 남자와 그 날 같은 자리에서 마주쳤을 뿐이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되던 그 날, 주인공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식당 문 앞에서 그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 편의 연극을 보듯 관객이 되어 바라보기만 했고, 주인공도 그 중 하나였다고 고백한다. 주인공은 그렇게 사회와의 통로를 잃었고, 한편으로는 사회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책의 말미에 감정을 되찾은 주인공은 이 날의 일을 다른 상황과 함께 다시 떠올린다.

 심 박사를 찾아간 어느 날이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폭격에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은 소년이 울고 있다.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관한 뉴스다. 화면을 보고 있는 심 박사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내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 다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 시선은 미소 띤 박사의 얼굴 뒤로 떠오른 소년에게 향해 있었다. 나 같은 천치도 안다.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중략)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면 엄마와 할멈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사람들은? 그들은 눈앞에서 그 일을 목도했다. (중략) 당시 성가대원 중 한 사람이 했던 인터뷰가 뇌리에 떠다녔다. 남자의 기세가 너무 격렬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다고.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 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 본문 244-245쪽

 그렇다. 감정을 못 느끼는, 공포를 모르는 주인공도 전쟁 피해 소년이 아프다는 걸 알았다. 하물며 공감까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타인의 아픔과 불행을 이리도 쉽게 외면하고 잊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것이 과연 진짜인가,라고 작가는 묻는다. 


 

 친구

 

 혼자 남겨진 주인공에게 중요한 두 인물이 찾아온다. 바로 '곤이'와 '도라'이다. 

 곤이는 우정, 도라는 사랑을 담당하고 있는데, 소설에서의 비중은 곤이가 훨씬 크다. 

 곤이에게 얽힌 사연 또한 만만하지 않다. 곤이의 부모님은 어릴 때 곤이를 잃어버렸고, 곤이의 엄마는 그 후유증으로 병을 앓다가 죽게 된다. 그녀가 죽기 직전, 남편인 윤교수가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았다며 병실에 있는 그녀에게 소년을 데리고 가는데, 실제 데리고 간 소년은 곤이가 아니라 주인공인 윤재였다. 재밌는 점은 곤이를 찾지 못해서 주인공을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곤이를 찾았으나 윤교수가 판단하기에 아내에게 보여주기에 적절하지 않은 모습이었기에 대타로 주인공을 데리고 간 것이다. 곤이의 엄마는 죽기 직전 평안을 얻었을 지 모르나, 윤교수의 이 판단으로 인해 주인공은 곤이에게 괜히 미움을 받고 엄청나게 두들겨 맞는다. 

 

  죽기 직전의 아내에게 아들을 찾았음에도 아내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할까봐 다른 아이를 데리고 간 윤교수의 행위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아내를 지극히 사랑한 결과일까, 아내와 아들을 믿지 못한 결과일까, 아니면 사실 그 자신이 잃어버린 아들이 현재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였을까. 윤교수의 진정한 속내는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한 윤교수가 겨우 찾은 아들 곤이와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간접적으로 알려 준다. 소년원까지 갔다온 곤이는 사람들에게 티 내지는 않았지만 스스로도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았고, 그 아버지 또한 자신에게 만족할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둘의 갈등은 깊어지고 곤이는 결국 아버지의 집 마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곤이의 방황은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다. 곤이를 둘러싼 사회 전체가 문제였다. 곤이는 낙인 찍힌 학생이었고, 애써 그 낙인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 인물이다. 아니 오히려 포기했다고 봐야한다. 모든 잘못을 뒤짚어 쓰고, 오해 받고, 따가운 시선에 시달리던 곤이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주인공은 의외로 공평하고 편안한 인물이었다. 감정이 풍부한 곤이와 감정이 없는 주인공의 우정은 그런 상황 속에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이 청소년들에게 주는 교훈은 주인공 보다는 곤이가 더 클 것이라 생각한다. 주인공은 특별하고, 특수하지만, 곤이가 학교에서 받는 오해와 방황의 흔적은 굉장히 익숙하고, 흔하며, 공감이 잘 되기 때문이다. 

 소설 전체에서 다뤄지는 중요한 테마인 '타인의 시선'에서 주인공은 자유롭지만 곤이는 자유롭지 못하다. 곤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중요시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존재다. 어찌보면 곤이와 주인공의 만남은 감성과 이성의 만남 같기도 하다. 그 둘이 잘 조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일까. 

 

 도라는 주인공에게 사랑의 감정을 일깨워준 인물이며, 부모님에 의해 꿈이 좌절됐지만 여전히 노력하는 인물이다. 

 곤이가 사랑에 대해 물어봤을 때, "번식을 위한 과정, 이기적인 유전자가 유도하는 본능"이라고 대답하던 주인공은 도라를 통해 "몸 전체가 북이 된 것처럼 울리고, 심장이 고동치는" 가슴으로 하는 사랑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주인공이 소설 말미에 곤이를 찾아다니는 노력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장면들은 심박사의 말대로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짧은 감상

 

우선 청소년 문학답게 끝이 해피엔딩이라 좋았다. 

윤재의 결핍과 곤이의 방황은 어찌보면 선천적이다. 심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어쩔 수 없는 타고난 문제인 것이다. 

교육현장에서 흔히 그런 학생들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가정에서의 문제라 학교에서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보여주듯 타고난 문제도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보다 솔직한 표현으로는 그런 것들은 처음부터 '문제'가 아니라 '해법'이 필요도 없다.

윤재를 변화시킨 것은 '아몬드'가 아니라 엄마와 할머니, 심박사와 곤이, 도라 등 주변 인물이었고, 곤이를 변화시킨 것도 윤재였다. 늘 우리는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런 상호작용으로 변화되어 간다. 

우리는 항상 그런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은 당장의 '과제'를 풀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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