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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책과 영화

[영화]카운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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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스, 영화가 끝나고 한참 멍한 상태를 유지했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먹먹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한 여러 감정이 교차한 영화였다.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그 어떤 영화의 주인공 보다 영화 같은, 아니 만화 같은 삶을 산 다카하시와 카운터스.

그 순수함과 열정, 행동력의 결과는 사회를 분명 조금 아름답게 만들었지만,

그들의 삶, 개인의 삶은 해피 엔딩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이 영화가 사실이기에.

차라리 만화 였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 또 무언가 아쉬웠으리라.

 

혐오의 시대

혐오의 시대, 지금 대한민국을 표현하는 한 모습인 것 같다.

온갖 혐오들이 넘쳐 흘러 사람들의 내면부터 오염시키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남혐과 여혐은, 부모 세대의 지역 갈등 만큼이나 심각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혐오가 넘쳐흘러 혐오 집회까지 이루어지고 있던 상태였다.

종종 뉴스로, 미디어로 보긴 했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준 그들의 생생한 모습은 과히 심각했다.

'조센징을 죽여라', '한국 여자를 거리에서 본다면 돌을 던지거나 강간을 해도 무방하다' 등

충격적인 말들이 버젓이 거리를 떠돌아다니고, 그 당사자인 재일 교포들의 가슴 속에도 무참하게 파고들었다.

집회를 주동한 사람은 일본 극우주의자들을 선동하여, 그 감정을 키워갔고, 온갖 소수자들을 조롱하며 즐거움을 누렸다.

'친하게 지내자'는 팻말을 들고 대화를 시도한 사람들은 그 비웃음과 과격함에 희망을 잃어버렸다.

혐오 집회, 공공장소에서 특정한 사람들을 유린하는 말과 행동이 난무하는 지독한 행위를 일본 경찰은 보호했다.

그 집회가 옳아서가 아니라 그 집회가 허가를 받은 합법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일본사람들이라고 모두 그 집회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 집회에 반대하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했고,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경찰은 오히려 그 사람들을 저지하고 체포하였다. 허가받지 않았기 때문에.

법치국가에서 공권력 행사의 기준은 법률에 의거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집회를 막을 법률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은 절망했으리라.

 

카운터스의 반격과 오토코구미의 등장

하지만 용기를 잃지 않은 사람들, '카운터스'에 의해 여러 가지 운동이 진행되었다.

법률 제정을 위한 입법 활동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홍보, 학생 교육, 대중 음악의 제작 등

마치 우리나라의 촛불집회 처럼 다방면으로 카운터스의 활동은 전개되었다.

하지만 카운터스 활동에 가장 큰 힘을 실어준 것은 그런 아름다운 활동들이 아니었다.

혐오를 폭력으로 부숴버리자는 생각으로 야쿠자 출신의 다카하시가 만든 비밀결사대 '오토코구미(男組)'가

카운터스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다.

'오늘만 사는 남자' 다카하시는 '남자가~'라는 말을 꼭 앞에 붙여 말하는 극우주의자 였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에 영 아닌 재특회의 활동을 보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 활동 양상도 그와 어울리게 터프하고, 시원했다.

혐한 시위의 주요 코스인 코리안타운 진입을 막기 위해 오토코구미는 몸을 날린다.

도로를 점거하고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여러번 체포당했지만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혐한 시위자들에게 대놓고 Fuck을 날리는 시원함, 그런 그의 면은 카운터스 활동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만족감과 용기를 준 것 같다.

오토코구미의 참여와 그 날의 대접전 이후 현한 시위의 코리안타운 내 진입은 허가되지 않았다고 한다.

 

진보 운동의 자격

과거가 어두운 다카하시의 카운터스 활동은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런 시민 운동, 진보적 활동, 리버럴 운동은 아주 깨끗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동시에 그 행동 양식도 점잖기 그지 없었고, 그러다보니 느렸다.

하지만 다카하시의 행동 양식은 기존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행동이 말 보다 빨랐고, 감정적이고, 과거가 어두운 다카하시. 그의 존재는 진보 운동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사람들이 공적으로 높은 자리에 가는 사람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물론 당연히 검증 해야 할 덕목이며, 아주 중요한 덕목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도덕성이라는 것의 범위가 너무 크고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문제,

공적 영역과 개인적 영역의 도덕성이 혼재되는 문제, 도덕성에 대한 판단이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는 문제로 인해

그 효과성이 의심되기도 한다.

다른 측면에서는 대단히 높은 지위에 가지 않더라도(정치인 같은) 개인적 차원에서 진보적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지는 자기검열도 문제가 된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이런 활동을 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자문이 거듭되면 행동은 따라오지 못한다.

영화 속의 다카하시는 자신이 나쁜 놈이었다고, 진짜 나쁜 놈이었다고 인정하고 반성한다.

과거의 잘못을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때문에 계속 잘못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카하시의 '오늘'만 사는 행위는 어찌보면 '어제'의 과오에 대한 반성으로 자신의 '내일'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

 

혐오표현금지법 제정과 일본제일당 창당

혐오표현 시위를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제 경찰은 카운터스가 아니라 혐한 시위를 제지하고 해산시킨다.

'친하게 지내자'던 어머니와 아들은 눈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뭉클한 순간이다.

하지만 과연 그 아들이 혐오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그냥 인정하고 살면 그뿐이다. 편견의 껍질을 제거하고 인간으로서 대하면 될 것이다.

그럼 그 편견의 고리에 갇히지 않고, 보다 많은 친구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법률이 제정되며 오토코구미는 해산했고, 다카하시는 다른 일을 찾아 떠난다.

혐한 시위를 주도했던 '사쿠라이'는 도쿄 시장 선거에 출마해서 11만 표를 얻어 5위를 했고, 일본제일당을 창당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각자 믿는 길을 계속 걸어갔다.

사쿠라이는 인터뷰에서 말한다.

"혐한 시위를 반대하는 것도 또다른 혐오이다.", "한국에서 일장기 불태우는 것도 혐오 표현이다."

라는 그의 주장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되려 두렵다.

다카하시는 오키나와 차별 반대 시민 운동 중 유죄를 받았고, 2018년 돌연사 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영웅'이 또 한 명 자연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늘상 하는 고민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카운터스'를 보고 또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다카하시'는 앞으로 이런 고민이 들 때마다 계속 떠오를 인물이라 생각된다.

고인을 추모하며 리뷰를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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