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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좋은 시

부모의 기도_ 반 부덴 부모의 기도 반 부덴 저를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하옵소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듣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질문에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게 하옵소서 저로하여금 그들의 생각을 가로막거나 꾸짖지 말게 하시고 그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거나 실수를 할 때 비웃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 자신의 만족이나 권위를 내세우려고 그들을 나무라는 일이 없도록 하옵소서 매순간마다 저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정직한 것이 옳은 것임을 일러줄 수 있게 하옵소서 제가 기분이 언짢을 때에 저의 입술을 지켜주시고 그들이 어른과 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들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회를 허락하는 참을성을 주시고 그들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하옵소서 저로 하여금 정직하고 바르며 친절한.. 더보기
담쟁이_도종환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더보기
수제비_도종환 수제비 도종환 둔내장으로 멸치를 팔러 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미류나무잎들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얇은 냄비에선 곤두박질치며 물이 끓었다. 동생들은 들마루끝 까무룩 잠들고 1군 사령부 수송대 트럭들이 저녁 냇물 건져 차를 닦고 기름을 빼고 줄불 길게 밝히며 어머니 돌아오실 북쪽길 거슬러 달려가고 있었다. 경기도 어딘가로 떠난 아버지는 소식 끊기고 이름지을 수 없는 까마득함들을 뚝뚝 떼어 넣으며 수제비를 끓였다. 어둠이 하늘 끝자락 길게 끌어 허기처럼 몸을 덮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국물이 말갛게 우러나던 우리들의 기다림 함지박 가득 반짝이는 어둠을 이고 쓰러질 듯 문 들어설 어머니 마른 멸치 냄새가 부엌바닥 눅눅히 고이곤 하였다. 더보기
아버지의 마음_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더보기
내가 나에게 안부를 묻다_장순익 내가 나에게 안부를 묻다 장순익 보내주신 백계동 녹차를 오늘에야 개봉했습니다. 막연히 함께 나눌 사람 있을 것 같아 단풍 들고 낙엽 지고 겨울이 깊어졌습니다. 밀어둔 신문 한꺼번에 읽다 손 시린 아침 찻물 끓여 쟁반에 놓고 두개의 잔을 놓으려다 흠칫했습니다. 차 한 잔을 따라 두 손으로 감싸쥘 때 뜻밖입니다. 내가 내 손을 잡아준 지 참 오랜만입니다. 덕분에 내게 안부를 묻습니다. 녹차 잎이 계절을 모르고 마음 가는 쪽으로 잎 펼쳐갑니다. 더보기
슈뢰딩거 방정식_김병호 슈뢰딩거 방정식 김병호 지난밤 내 토사물이 실재 냄새를 풍기더라도 내가 여기 있거나 바람이거나 없는 것처럼 여자도 수탐타 마을에 있을 확률이 70이 넘지만 산길 웅덩이이기도 하고 150MB짜리 파일이기도 한 여자는 눈길 닿는 곳 어디에도 그림자가 떠돌아 나는 떠난다 나의 목덜미 할퀴는 성욕 없인 여자는 없고 여자의 그림자들을 수탐타 마을로 모을 수 없고 마을이 애당초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여자의 딱딱한 오해 없이는 내 가죽 안의 질량도 각자 고향으로 흩어져버린다 소문은 대개 정확했다 길 위에서 나는 세 줄의 물결이기도 하다가 속 터진 작은 짐승의 시체였다가 지나는 사람의 속옷을 아무 흔적 없이 벗기기도 하며 마을에 도착하자 거기는 폐허뿐이었다 분명 머리카락 길게 자라고 통통하게 살 올랐을 겨드랑이도 신.. 더보기
영순씨를 기다리며 쓰는 연서_김병호 영순씨를 기다리며 쓰는 연서戀書 김병호 미안합니다. 영순 씨, 당신께 한 장 편지 쓰는 일도 이렇게 한잔 낮술이 필요합니다. 마을은 푸릅니다. 그러나 이 푸름은 뭔지 모르게 들떠 있습니다. 이 마을에도 또 하나의 우주가 그림자만큼 가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오른손 손가락 사이로 왼손 손가락이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죠. 초록의 그림자가 초록입니다. 멀쩡한 것이 슬퍼 보이는 건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슬픈 우주와 겹쳐 있는 곳이 바로 거기 그림자께여서입니다. 소주는 다른 우주를 볼 수 있는 1000원 짜리 투시제라는 사실도 함께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밀가루 반죽처럼 한 몸이어서 공간을 늘여대면 옆면인 시간이 쫄아 붙고 시간을 많이 쓰면 공간이 꼼짝 않.. 더보기
접기로 한다_박영희 접기로 한다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심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 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 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 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