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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좋은 시

영순씨를 기다리며 쓰는 연서_김병호

영순씨를 기다리며 쓰는 연서戀書


                                                                                      김병호


미안합니다. 영순 씨, 당신께 한 장 편지 쓰는 일도 이렇게 한잔 낮술이 필요합니다.
마을은 푸릅니다. 그러나 이 푸름은 뭔지 모르게 들떠 있습니다. 이 마을에도 또 하나의
우주가 그림자만큼 가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오른손 손가락 사이로 왼손 손가락이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죠. 초록의 그림자가 초록입니다. 멀쩡한 것이 슬퍼
보이는 건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슬픈 우주와 겹쳐 있는 곳이 바로 거기
그림자께여서입니다. 소주는 다른 우주를 볼 수 있는 1000원 짜리 투시제라는 사실도
함께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밀가루 반죽처럼 한 몸이어서 공간을
늘여대면 옆면인 시간이 쫄아 붙고 시간을 많이 쓰면 공간이 꼼짝 않는답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당신과 만날 그날까지 가장 빨리 시간을 낭비하는 방법은 꼼짝 않는
것입니다. 공간을 안 쓰면 시간은 빨리 갑니다. 몇 날을 꼼짝 않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이 야속한 지구는, 위도 37도인 이곳에서 1초에 464m의 속도로 자전하고
있었습니다.(아, 어지러워라) 또 1초에 29km씩 공전하고 있으니, 거기에 우리 은하 또한
어마어마한 속도로 돈답니다. 돌겠습니다. 꼬인 내 인생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당신이 꿔간 (내 전 재산) 500만 원은 절대 아깝지 않습니다. 당신은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 뉴턴의 실수에 대해 알았습니다. 그는 실연을 당했습니다.
사랑이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절대공간을 만들었던 거죠. 상대적인 걸 설명할 수 없던 그는 절대 사랑이라는
말로 그냥 얼버무려 넘어갔죠. 여자는 그를 떠나 과학사를 왜곡했고(영순 씨, 당신은
이 여자와는 다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연애는 성공했지만 절대 500만 원이
아깝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잊을 수 없는 첫날밤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수줍음은 강한 핵력과 같았습니다.
여관방 화장실문은 열리지 않았고 안에서는 하염없이 물 흐르는 소리와 코고는 소리가
났지만 그렇게 나는 문고리를 부여잡고 당신에 대한 끓는 사랑을 혼자 해결했지만,
잠 깬 아침 (화장실에 선홍으로 얼룩진 한 장 팬티를 남기고 사라진) 당신 없는 화장실에서
문 열어놓고 혼자 샤워했지만 오래오래 샤워해 여관비는 아깝지 않았지만, 상처 없이
닫힌 공간을 뛰어넘는 일은 우리가 사는 3차원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걸 몸으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내 사랑의 가장 큰 관건은 시간입니다. 다른 차원에서나 가능한
유연한 시간.
내가 당신께 달려가지 못하고 여기서 기다리는 이유는 150근짜리 내 몸이 강력한 중력장에
묶여 있어서가 아닙니다. 영순 씨가 떠나던 날 내게 집어던졌던 휴대폰이 깨지면서 만든
사랑장 때문입니다. 이 마을에 중력은 없습니다. 나는 둥둥 떠다니지만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장場에 걸린 당신과 500만 원을 기다리면서
                                                                       - '과학인문학'(글항아리)에 실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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