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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좋은 시

난 나를 본 적이 없다_이승훈 더운 여름 아파트 앞 구두 수선소 작은 의자에 앉아 구두 고치는 걸 구경할 때 수선소 아저씨가 말하네 글쎄 언젠가 교수님 지나가는 걸 보고 어떤 손님에게 저 분이 알아주는 대학 교수라고 했더니 그 분 말씀이 교수 같지 않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아닙니다 알 아주는 대학 교수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인데 아주 소박하신 분입 니다 그래요? 난 웃으며 말했지 내가 생각해도 그래요 교수가 도 무지 왜소하고 품위가 없잖아요? 여기 앉아 저쪽으로 걸어가는 나 를 본다면 나도 그럴 겁니다 난 나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더보기
팔당대교 이야기_박찬일 팔당대교 이야기 박찬일 승용차가 강물에 추락하면 상수원이 오염됩니다. 그러니 서행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차를 돌려 그 자리로 가 난간을 들이받고 강물에 추락하였습니다. 기름을 흘리고 상수원을 만방 더럽혔습니다. 밤이었습니다 하늘에 글자가 새겨졌습니다 별의 문자 말입니다 승용차가 강물에 추락해서 상수원이 오염되었습니다 서행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은 것은 사람들이 모릅니다 하느님도 모릅니다. 더보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_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더보기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_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 더보기
병원_윤동주 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더보기
강_황인숙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비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더보기
구름 해설_고은 술 깼어 2천년이나 묵은 동아시아 넋두리 하나 있어 생야 일편부운기요 사야 일편부운멸이라 더러 내 입에도 발려나와 이것으로 제법 세상을 얼러보았어 과연 그럴까 태어남이 살아옴 살아감이 한 조각 이는 구름이요 억울하게시리 세상살이 작파해야 하는 것 그것이 한 조각 구름 사라짐인가 상여 나갈 때 상여 앞귀에 내건 구름 운자도 황천길 가 저승 구름 되었다가 이승의 비로 내려온다는 그것인가 구름이라 구름이라 한 조각 구름이라 때론 상서로운 구름 자색 구름 때론 이팔청춘 푸른 구름 때로는 미친 구름 때로 달 묻어 흉흉한 밤 대궐에 무슨 변고 있을 구름이라 동아시아나 서아시아나 유라시아나 이따위 제 앞가리기 구름 노릇이다가 19세기쯤 한 허름한 영국 촌녀석이 하도 하도 구름에 들린 나머지 날이 날마다 구름 보다가 .. 더보기
태백으로 간다_고은 오늘도 내 발밑에서 고생대 화성암 층층의 억센 함구로 캄캄할 것 오늘도 내 서성거리는 발밑에서 바스라져 바스라져 쌓여 울부짖다 퇴적암의 굳은 포효로 캄캄할 것 어찌 이뿐이랴 오늘도 그것들의 길고 긴 변성암의 밤으로 지새울 줄 모르고 캄캄할 것 이토록 지엄한 암석의 하세월로부터 내 고뇌가 와야 한다 가버린 저쪽 내 고생대의 한 조각 화석으로부터 그 화석의 깊으나 깊은 잠의 수렁으로부터 절망으로 절망의 절망인 희망으로 깨어나 내 고뇌의 새벽이 오싹오싹 와야 한다 최소한 저 1960년대 10년의 밤들 그 불면으로 엎드린 밤들 울다 울다 울음 하나 남은 것 없던 내 가뭄의 갈비뼈 불질러 와야 한다 저 1970년대 10년의 날들 그 싸움 기슭 내 맹목의 살점들 지글지글 타던 모두의 숨찬 넋들로 새로이 와야 한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