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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날 일이 많다 듣다보니 결국 그 얘기다 세상이 바뀌었다, 위기의식을 가져라 변해야 한다, 노력해야한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대로신지 이탈리아, 스페인, 호주, 일본.. 안 가본 곳이 없는 이 친구 덕분에 나는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아진다 한 번 갔다 온 사람이 이리도 빠삭한데 무엇하러 나까지 가겠는가 잠시면 된다던 텔레마케터는 15분 째 허공에다 대사를 읊는 중이다 자기 할 일을 끝까지 다하는 ‘잠시’란 나에게 영원과도 같았다 굳이 전화를 끊지 못하는 나는 누구에게 예의를 차리고 있는가 ‘동의하시나요.’ 설마요 밥 먹으라 한다 너 때문에 차렸다, 한다 안 먹는다고 하니, 약속이 있냐고 한다 불행히도 약속은 없으나 먹기 싫다, 했다 그러면 밥 먹으라, 한다 엄마가 부장님과 겹쳐 보였다 어디가냐, 했더니 어디 좀 간단다 별일.. 더보기
폭풍의 언덕_기형도 이튿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유리 같은 밤을 지났다. 그날 우리들의 언덕에는 몇백 개 칼자국을 그으며 미친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누이는 긴 팽이모자를 쓰고 언덕을 넘어 갔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 어머니 왜 나는 왼손잡이여요. 부엌은 거대한 한 개 스푼이다. 하루종일 나는 문지방 위에 앉아서 지붕 위에서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 있는 유지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 조용히 골동품 속으로 낙하하는 폭풍의 하오.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 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 공중에서 휙휙 솟구치는 수천 개 주삿바늘. 그러고 나서 저녁 무.. 더보기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_오규원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오규원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 오규원, 「한 잎의 여자」, 문학과 지성사, 1998 더보기
아, 입이 없는 것들_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 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더보기
이른 비 이른 비 오랜만에 우산이 펼쳐진다. 자글자글한 구김이 흘러간 세월의 주름살 같다. 바빠진 장사꾼들의 얼굴은 젊음을 되찾는다. 언제쯤 3000원짜리 우산을 사는 마음이 가벼워질까 자연스레 많아진 지하철의 거렁뱅이들 그들의 눈빛과 목소리에 나는 화답하지 못한다. 오래 전 지구가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수 천년 동안 내렸던 그 뜨거운 비를 생각한다. 식어버린 그 뜨거움을 바라보며 내 가슴의 열기를 느껴본다. 바쁘게 머리를 털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다시 한 번 거렁뱅이들의 비어있는 소쿠리를 바라본다. 호주머니 속 텅 빈 지갑을 매만져본다. 아직 얼어붙은 땅에 조금 이른 비가 내린다. 오늘은 눈이 아닌 비가 내린다. 벌써 봄이 오려나.. 달력은 찢겨질 날만 기다리는 데 성급한 하늘이 먼저 봄소.. 더보기
무료 세신사 무료 세신사 나이를 모르겠다. 아니, 나이가 무색하다. 켜켜이 쌓인 세월은 어디가고 부모와 자식만 존재한다. 또 그 부모의 부모와 자식.. 등이며 팔이며 엉덩이까지... 아비는 샅샅히 때를 몰아간다. 그렇게 아프고 힘들었던 순간이 어디로 갔나.. 그래도 아비는 최선을 다한다. 돌아서는 길, 없는 손에 무어라도 만드시는 창조주. 내 마음에 금괴가 지어진다. 더보기
하루의 인생 하루의 인생 하루 종일 부산스러움과 고독을 동시에 느끼고, 돌아온 집은 고요함과 어수선함으로 나를 반긴다. 혼자라는 생각은.. 주위가 매우 소란스러울 때 사무친다. 별로 큰 목적도 없이 혼자 동굴에 들어가 괜한 발길질로 돌멩이를 걷어찬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만나면, 왈칵 마음을 토해내 버릴 것 같다. 다시 혼자가 되면 후회가 따라오겠지만... 별로 밝지도 않은 하늘과 별로 딱딱하지 않은 대지에 난 언제부터 살고 있었나? 창문 밖에서 들이치는 자동차의 소음과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 동시에 머릿속에서 아우성치는 지난 소리들.. 아마 꿈에서나 보려나보다. 별똥별이 떨어진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