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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

쿵쿵 쿵쿵 밤중이었다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앞을 비추었고 자동차는 그 방향으로 나아갔다 쿵 급히 날아오르던 기러기가 부딪쳤다 핏자국을 남기기도 전에 자동차는 나아갔다 밝음 사이로 몇몇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쿵 쿵 작은 것들은 소리도 남기지 못했다 빛은 길이었다 자동차는 길을 따라 나아간다 쿵쿵 쿵쿵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남겨졌다 사방이 환해지고 빛의 길이 사라질 때까지 자동차는 앞을 향해 나아갔다 더보기
모서리에 빠지다 늘 모서리에 서 있었다. 위태로운 날카로움 위에 서서 벗어나지 않은 채 줄타기를 이어갔다 그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었다 종이에 베이듯 인식하지 못한 틈으로 상처들이 쌓였다 빨간 선이 겹쳐지며 강이 되고,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었다 풍덩 밖에 서 있으며 느낀 안도감은 사라지고 온통 검은 면 위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이 되었다 색은 어둠 속에 묻히고, 검은 공간 속에 검은 바닥은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모서리만 잠시 진동하다 멈춘다 검은색과 검은색 사이에는 모서리가 없는 것인가 그 어느 경계를 찾고 싶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바다 위를 걷기로 한다 조용히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어간다 온통 까만 공간에서도 얼룩은 있었다 얼룩덜룩한 무늬들을 교대로 밟아갔다 두 손에 검은색을 담아본다 어두운.. 더보기
하기 전에 싫다 아침이다 눈은 떴지만, 여전히 뒤척인다 일어나기가 싫다 오늘 하루 펼쳐질 고단한 삶이 오늘 하루의 시작과 함께 마중 나온 것 같다 그 여정을 온전히 감내하지 못할까 두려워 일어나지도 않은 채 일어나기를 싫어한다 어떤 일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가 그려진다 그럴 때면 그 일들이 두려워져서 시작조차 못 하곤했다 공부가 그랬고, 사랑이 그랬다 난 결과를 몰랐지만 무수히 많은 실패를 목격했고 수없이 조언을 들으며 그들의 두려움을 행동 지침으로 삼았다 난 실패가 싫었고, 실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무서웠고, 실패한 후 실패자가 된다는 것도 싫었다 성공보다는 실패하지 않는 삶, 실패하지 않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지만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고백은 했지만, 상처는 적었다 나는 성공적으로 방어.. 더보기
호랑이의 추억 노력보단 재능, 재능보단 운의 문제이다 내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직설적으로 내 입맛의 변덕과 같은 그런 문제이다 쑥은 어릴 때 할머니가 곧잘 따서 주셨다 소화제라고, 그때도 나는 먹는 척만 하며 입안에 한참 머금다가 나중에 뱉어냈다 할머니는 등을 토닥여주시며 그래도 먹어봐, 하셨다 가끔 배가 고파 정신없이 먹다 보면 조금은 쑥이든 마늘이든 입안으로 들어갔겠지 그래도 그건 역시 운의 문제였다 대체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컸고, 그들은 작았다 그들은 무방비였고, 나는 무기가 있었다 나는 먹었고, 그들은 먹혔다 결국 나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서야 내 운이 다했음을 알아버렸다 더보기
두 개의 방 서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지만, 상황이.. 세상은 복잡하고 사람은 다양하다고, 미처 생각지 못한, 오해가, 감정적으로, 텅 빈 방이 쪼그라든다 반대편에선 가득 찬 방이 점점 커져왔다 방이 겹쳐지며, 빈 방의 경계가 흐려졌다 오해가 풀렸다고 말했다 정말 이해한다고 말했다 빈 방의 주인은 사지를 움츠리며 자물쇠를 채웠다 더보기
[출사]강릉 안반데기 더보기
낙엽 떨어지는 소리 날이 혹독했다 조금 일렀지만 우수수 떨어진다 피부는 갈라지고 손에 힘이 빠져 놓아버렸다 이별의 감각은 계절의 변화처럼 조용히, 그리고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동네는 조용했다 한 잎 한 잎 세어보다 휙 지나가는 바람에 다시 우르르, 한꺼번에 떠나간다 폭우가 내리던 날의 소란도, 뒤이은 번갯불의 화려함도 없이 그저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이별의 순간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낙엽을 밟으며 뿌리를 쳐다본다 더보기
꽃샘추위 3월은 가장 추운 계절이다 삼일절과 함께 난방과 온수는 사라졌고 봄 햇살에 들뜬 사람들의 기대 속으로 시베리아 고기압은 칼끝을 찔러왔다 몇몇이 죽어나갔다 얼음은 아직 땅속에 남아있었다 서둘러 핀 꽃들이 이내 옷을 접었다 벌들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향기는 아직 필요 없었다. 몇몇은 폐 속에 고드름이 맺혀 죽어나갔다 땅 속에서 썩은 냄새가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 봄비 속으로 세균들이 흘러내렸다 아직 새벽은 검고 해는 없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