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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

제목기(除木器) 거실이 좁아 나무를 벴다 아버지는 어둡다며 형광등을 갈아끼웠다. 집은 껍질을 태워간다. 불이 다시 하나둘 켜졌다가 이내 꺼졌다. 저녁을 준비하던 어머니는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맛이 예전만 못하다며 아버지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베란다에서는 봄꽃이 멀리가지 못하고 수근거렸다. 몇몇은 올해 농사가 이미 망했다고 느낀다. 잎사귀는 그래도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산소가 방안에 조금 퍼진다. 거실 마루가 너무 딱딱하여 서있기가 힘들다. 천장의 밝기가 수시로 변하여 밤낮이 헷갈린다. 밤이 지속되어 모두가 잠에 빠졌다. 작은 새싹은 마루 틈새에 깨어있었다 더보기
작은 빛 여우에게 듣고서야 장미가 보였다 침묵은 잔잔한 물결을 드러내 보였고 아껴두었던 단어가 자리를 잡았다 희미한 빛을 따라 길을 걷는다 너무 밝은 빛은 피해야한다 간혹 빛이 빛에 지워졌다 메마른 사막에서 친구는 명확했다 매서운 바람에 언덕이 밀리고 다음 날이면 새로운 세상을 맞았다 기뻤다.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것이 무엇이든 삶은 소중해졌고, 짝은 여전히 모래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 풀이 돋아났다, 곧 몇몇이 모여들었다 우리도 다시 길을 걸었다 장미는 늘 사랑을 보여 달라고 했다 큰 빛에 늘 가려져 있던 사랑을 어둠 속으로 보내야 했다, 작게 빛났다 어둠 속에서 사랑은 작게 빛나고 있었다 더보기
속 없는 밤 식탁 위에 밤이 한 가득이다. 마을 지천에 밤나무가 가득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식탁의 밤은 줄지 않았다. 주로 동생이 밤을 주워왔고, 아이는 그 밤을 싫어했다. 가끔 식탁 위로 손이 갔지만 밤을 먹지는 않았다. 밤길에 집에 갈 때면 발밑에 밤이 곧잘 채였다. 밤을 새고, 세며, 조금씩 곪아간다. 읍내가 멀어 시간 감각이 없어지곤 했다. 해지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엄마가 왔다. 결국 밤은 익어버렸고 아이는 먹을 수 없었다. 밤송이를 가를 때는 늘 손을 조심해야 한다. 동생은 아이의 손에 난 피를 보며 가르치려 들었다. 잎사귀에 둘러싸여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들어갈 수가 없다. 아이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불안해져 버린다. 밤은 여전했고, 그 날은 밤이 줄지 않았다. 더보기
학생의 학생 학생 하나는 말이 없었다. 학생 둘은 질문이 많았다. 학생 셋은 늘상 졸고 있었다. 학생 넷은 책 속에 책이 있었다. 학생 다섯은 사탕과 초콜릿의 노예였다. 학생 여섯은 주변을 조용히 시키며 떠들어댔다. 학생 일곱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고 숨기고 있었다. 학생 여덟은 앞을 보며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눈다. 학생의 학생은 배우고, 배우고, 배웠다. 더보기
대화 하지 마/ 왜 / 원래 그런 거야 원래 왜 그래 / 원래 그랬으니까 원래 왜 그랬는데 / 그 전부터 쭉 그랬으니까 그전부터 왜 쭉 그랬는데 / 사람들이 그렇게 하자고 했으니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 좋으니까 그렇게 하면 서로 왜 좋은데 / 서로 피해를 안 주니까 자기도 이득이 없잖아 / 대신 남도 이득을 못 보지 아무도 이득이 못 보는 게 좋은 거야? / 피해를 보는 것 보다는 낫지 그럼 나는 엄마한테 이득이야? / 이득이지 내가 남들한테는 피해를 줘? /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왜 낳기로 한 거야? / 엄마가 좋으니까 아빠도 좋다고 했어? / 당연하지 그럼 나는 피해를 입겠네 / 왜? 엄마 아빠 둘 다 이득이라며 / 그런데 그럼 나는 손해를 보지 / 왜? 엄마가 그런.. 더보기
소는 잃었지만 외양간은 고쳐야지 종이 치자마자 종이를 찢어버린다 휴지통은 금새 넘쳐흘렀다 사는데 아무런 필요도 없는 공부였다,고 방송에서 유명인이 말했다. 어서 자기에게 필요한 공부를 하라고,도 말했다. 그게 뭘까요? 적성을 발견하는 축복은 쉽게 일어나지 않아, 흥미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야, 그러니까 꿈이 뭐냐고 제발 묻지마 거리는 대부분 아름다웠다 몇 찌푸린 사람들도 이내 웃었다 살짝 여린 날씨가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플라스틱 사이로 스티로폼이 들어있다 - 분리수거는 왜 하는거야? - 종량제 봉투 아끼려고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아껴서 화장을 한다 쓰레기들도 제 자리를 찾아가겠지, 지나쳤다 취미는 그냥 걷기입니다. 특기는 그냥 운동입니다. 집에 아무도 없다. 대본을 짠 노력도 아깝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케잌이 들어있었다... 더보기
맹꽁이 펌프가 돌아가고 분수가 솟아올랐다 맹꽁이가 울었다 돌이 적셔지고 이끼가 번져나갔다 맹꽁이가 울었다 새들이 날아올랐고 구름이 걷혔다 맹꽁이가 울었다 전기가 끊어지고 낙엽이 떨어졌다 맹꽁이는 울었다 더보기
칼집 새로운 만남에 늘 과거가 따라다닌다. 그들은 물었고, 난 김칫국물 같은 과거에게 다시 물었다. 넌 무엇을 남겼냐고. 이미 맛도 향도 사라진 흔적은 어떤 실패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 많은 시간들이 빨간 우물에 빠져 섞여버렸다. 난 알아볼 수 없는 선들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다.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나를 찾아 헤맨다. 오늘도 어제를 돌아보고, 어제도, 어제의 어제도 돌아보았다. 그렇게 늘 무뎌진채 칼은 갈리고 있었다. 여전히 과거를 돌아보며 고개를 젓는 미래는 지금의 향을 잊은 채 칼집에 칼을 넣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