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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책과 영화

[책]아프니까 청춘이다_김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청춘은 아프다. 고통을 수반한다.

그것이 마음의 청춘이든 육체의 청춘이든.

고통.책에서 말하는 그 고통이란, 무거운 고통이다.

스스로 받아들이는 능동적 고통이자, 나아가기 위한 고통이며무거울수록 더욱좋은 고통이다.

동시에 묘한 즐거움도 수반하는 고통이고, 훗날 환전이 가능한 저축형 고통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난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진부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교훈들은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으며, 죄다 자기자랑만 늘어놓은 의미 없는 책으로 느껴졌다. 허나 이 책은 진부하지 않았어떤 면에선 지극히 현실적이고 진부한 이야기어서 새롭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현실을 바탕으로 청춘들을 이해하고 고통을 공감하며 동시에 희망을 이야기한다.

 

※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photo-2605332/

 

누구나 하루 24시간 1365일을 알차고 행복하게 채우고 싶지만,

그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시간은 사실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살면서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참 '최선'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특히 올림픽과 같은 스포츠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이 하는 인터뷰에선 거의 반드시 등장한다.

"최선을 다한 경기라 만족합니다."

수능이 끝난 후 학생들도 비슷하다.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최선을 다 했습니다."

조금 느낌은 다르지만.

어른들도 물어본다. 최선을 다했느냐고.

극한까지 나를 몰아붙이고 짜내야 하는 것일까? 그게 최선인 걸까?

 

내가 쓴 시 중 '최선'에 대한 시가 있다.

시는 단순하다

과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존재할까? 그 순간 얼마나 노력하여야 최선일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시였다.

결론적으로 난 그냥 그런 것이 싫다. 최선 부정하고 싶다.

난 이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난 아직 여지가 있다. 더 잘할 수 있는,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그래서 아직 나는 괜찮다.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까. 조금 더 노력해도 된다.  

조금 돌아간 그 시간들이 나를 더 풍족하게 만든다. 다음엔 더 잘할 것이다.

이런 시각이 좋다. 이런 생각은 나를 편안하게 한다.

이런 생각은 나를 좌절하게 하지 않았다. 좌절하지 않으니 또다른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photo-2405104/

 

과거의 내가 어떻게 나의 최선일 수 있겠는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면 충분하다.

난 그런 태도 자체가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계속 아프고, 힘들겠지만, 그것이 청춘의 삶이 아니겠는가?

 

아직까지도 사회 곳곳에서 소위 대들이 활약한다. 

그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 "넌 아직 어려서 잘 몰라" "너도 내 나이 되면 알거야" 등등 

 

참 바보같다. 사람은 거의 대부분 자신이 해보지 않은 일을 미래에 하게 되고,

여태껏 자신이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평가하며 즐거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면 정신적으로 늙은 것이다.

반대로 그렇지 않다면 청춘인 것 같다.

나이는 여전히 숫자일 뿐이다. 젊다고 꼰대가 아닐 거라 생각하지 말자.

 

'아프니까 청춘이다' 에 실린 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내용을 옮기며 글을 마무리 하겠다.

 

 “곧 어디엔가 자리를 잡고, 일상의 깊은 늪으로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금씩 조금씩, 나는 그렇게 빠져들 것이다. 적당한 이유를 댈 수 있는 속도로,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어느순간 쉽게 이름을 얻고 편히 돈을 얻는 일에 나의 꿈꾸기는 자리를 내어주게 될지도 모른다. 자애(自愛)를 담보로 한 이 도덕적 치열함도 차츰 탈색해갈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아마도 얼굴엔 주름이 지고 이마에는 광택이 들어, 바로 노인의 외모를 가지게 되리라. 치열한 꿈꾸기의 상실은 단순히 나이를 먹어감이 아니라, 안정과 안락의 보수성에서 비롯한다. 슬픔이 시인의 양식이듯, 불안은 치열함의 방부제다. 실패에 내재된 개혁성만이 그러한 꿈꾸기를, 늘 꿈꾸기를 포기치 않는 질긴 나르시시즘만이 그러한 치열함을 가능케 한다. (중략)

늘 꿈꾸기를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보다, 꿈꾸기를 망각하는 것이 백배는 더 무섭다. 따라서 꿈꾸기의 가장 은밀하지만 치명적인 적()은 꿈의 성취 바로 곁에 숨어 있다. 그 성공의 보수성. 내가 작은 성취에 마취되어 꿈꾸기를 천천히 잊게 되거나, 삶의 치열함을 차츰 잃게 될 것이 두려워서 이 글을 쓴다. 지금의 이 불안함과, 불안 속에서 키우고 있는 이 치열한 꿈꾸기가 부패하지 않도록.

매일매일 나를 일깨우는 이 버거운 현실과 어둔 미래가 명치끝 그 깊은 곳에서 나를 까맣게 태우는 오늘, 지금이 어쩌면 내 생애 중 가장 풍요로운 순간이리라 되뇌면서, 나태의 나락에서 몸을 추스르지 못할 그 어느 날에 바로 오늘의 불안과 오늘의 자위를 한 번만 되살려달라는 바람에서, 이 글을 쓴다.“

 

※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photo-98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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