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형도

폭풍의 언덕_기형도 이튿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유리 같은 밤을 지났다. 그날 우리들의 언덕에는 몇백 개 칼자국을 그으며 미친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누이는 긴 팽이모자를 쓰고 언덕을 넘어 갔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 어머니 왜 나는 왼손잡이여요. 부엌은 거대한 한 개 스푼이다. 하루종일 나는 문지방 위에 앉아서 지붕 위에서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 있는 유지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 조용히 골동품 속으로 낙하하는 폭풍의 하오.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 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 공중에서 휙휙 솟구치는 수천 개 주삿바늘. 그러고 나서 저녁 무.. 더보기
10월_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더보기
정거장에서의 충고_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더보기
전문가_기형도 專門家(전문가) 기형도 이사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 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