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화/좋은 시

연두에 울다_나희덕

손아무 2025. 3. 27. 09:10

떨리는 손으로 풀죽인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눈에 밀어넣었다
연두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동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 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 현실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동안에도 가슴 한 구석에선  여전히 어떤 꿈이 꿈틀거리기 마련이다.
  그 꿈은 일상적인 이동의 순간에도, 허기를 채우려고 식사를 하는 단순한 순간들에서도
  내 근처를 머물며 나를 자극한다. 그런 게 가슴 속에 있다는 표현의 의미일 것이다.
  결국 나는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가겠지만 마음 속에 그 꿈이 남아있다면 
  아직 인생은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의 오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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