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반영 반영 떠나왔다 멀어지면 잊힐 거라고 스스로는 잊지 못한 채 그렇게 떠나왔다 돌아오는 계절은 늘 지나간 계절을 휘적거리며 지나갔다 너와 난 반대야 반대도 필요 없는 반대야 동의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함께 할 수도 없었다 지구는 떠나지 못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지구 반대편 너의 발밑에서 뒤집힌 채 살아가기로 한다 우리는 서로의 어둠일까 수평선에 선을 그어본다 넘어오지 말라, 중얼거려 본다 실체 없는 파도는 부지런히 실체가 떠난 발자국을 지워갔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도 나는 그저 선을 감시하고 파도는 발자국을 지우고 배는 들락날락거렸다 어둠이 완전히 내릴 때까지도 더보기
걷다 걷다 나는 독하지도 않고, 모질지도 못한 사람이라 뒤처지고 지워지기 쉬운 사람이다 날지도, 뛰지도 못하는 나는 그저 두 다리가 멀쩡하여 걸어가는, 살아가는 사람이다 김장 날에 팔을 걷어붙이고 명절이면 눈꺼풀을 걷어 올리며 그저 그런 소소한 일들을 그보다 더 소소하게 해결하는 손도 작고 발도 작은 사람이다 싹싹한 미소를 얼굴에 걸어두고 매일매일 초등학교를 드나들며 아들 손을 잡고 집주변을 거니는 걸음이 가벼운 사람이다 걷다가 아름다운 꽃이라도 발견하면 아들과 쪼그리고 앉아 한참 걸음을 멈추기도 하는 빈틈이 있는 삶이다 * 제38회 새얼백일장 차상 수상작 더보기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운명일거다 내가 여전히 파란 하늘 밑에 누워 그때를, 그때의 너를 추억하듯이 너 또한 하얀 구름에서 나를 그리고, 나의 모습을 찾고 나와의 재회를 기다리겠지 바람이 불어 가지가 흔들리듯이 비 오는 날 구름이 안 보이듯이 원인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날, 그날의 날 찾아 안아주던 넌 운명일 수밖에 없다 하얀 배경에 점을 찍듯 또렷한 초점으로 널 여전히 바라보는 나 하늘의 색이 바뀌고 떨어질 잎이 없어져도 많은 일들이 시간에 묻혀가는 그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나는 운명의 선택이다 더보기
지각(遲刻) 없는 지각(地殼) 지각(遲刻) 없는 지각(地殼) 힘껏 달려왔지만 도착한 곳에 내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는 타인을 모든 타인이 경계한다 ‘여긴 안 돼’ 소리는 없었지만 확실한 외침 그 기류에 대기가 움직이고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었다 한발 늦은 나는 밤이 될 때까지 얼굴의 물을 닦으며 서 있었다 얼른 어둠이 내 모습을 감춰주기를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진부한 질문을 별에게 던져본다 ‘내 자리는 어디일까’ 대답 못 할 달에게 하소연한다 드러누운 내 뒤쪽으로 지구가 속삭인다 ‘넌 지금 어디에 있니’ 더보기
멸종 멸종 흔히 그렇듯 그는 느껴지지 않게 존재했다 인식은 선택적으로 그를 지웠고 그의 숨소리는 가끔 어떤 향에 섞인 채 발소리를 내곤 했다 누군가 그를 회상시키면 잠시 수면 위로 떠오른 심해 생물의 그림자처럼 진하게, 하지만 희미하게 다시 사라져 갔다 시작이 언제인지 모르는 만큼 마지막도 경계가 흐릿했고 비가 쏟아지는 날의 구름처럼 존재감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다시 사라졌다 사람들이 그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의 발자국, 숨소리, 노폐물까지 그를 본 사람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신은 그를 보았는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도 고개를 저었다 더보기
해를 넘어가는 지구 해를 넘어가는 지구 올해도 지구가 태양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새로운 만남과 이별의 도화선이 폭죽에 불을 붙이고 전 세계에서 터지는 샴페인에 지구는 잠시 후회했지만 사람들과 눈물과 웃음이 모두 뒤섞이고 엉켜있어 당최 말을 걸 수 없었다 울다가 웃고 다시 심각해지고 아직 흘러가지도 않은 시간에 휘둘리는 사람들 지구는 그냥 더 빨리 돌고 싶었지만 늘 그랬듯 정해진 하루의 양만 채울 수 있었다 늘 멈춰있는 태양을 새삼스레 새롭게 바라보는 그날, 그 요란함을 지구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새 해는 없는데 태양 주변을 한 바퀴 돌 때마다 갑자기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사람들을 보며 지구는 더욱 빠르게 자전하고 싶었다 그냥 다 우주로 날려버리고 빠르게 회전하는 발레리나처럼 혼자 우아하게 돌며, 우주를 누비고 싶었다 하지만.. 더보기
교사의 동력 교사의 동력 아름답구나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네가 대단하구나 결실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도 노력을 그치지 않는 네가 고맙구나 그 사려 깊은 마음으로 내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해 줘서 힘내야겠구나 앞으로도 마주할 너와 같은 희망을 위해 더보기
벗은 머리 벗은 머리 오늘도 머리카락이 빠졌다 새로 돋아나기 위한 빠짐이 아닌 그냥 원천적 이별에 가까운 빠짐이다 어릴 때는 곧게 뻗은 생머리가 풍성하다며 지나가는 이모들이 자주 쓰다듬어 주곤 했다 지금은 누구보다 내가 많이 쓰다듬지만 벌거벗겨진 기분 그건 옷이 벗겨질 때도 느끼지만 머리가 벗겨질 때 더 심하게 느껴진다 너무 일찍 달아난 젊음 멀어져가는 머리카락을 잡아보려 갖은 노력을 다 해봤지만 그 노력은 젊음과 더 멀어지게 했다 술도 못 마시는 약, 약, 약 약은 사람을 약해지게 하는 것이 맞다 숲에 기생충이 들었으면 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 맞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면 시원하게 밀어버리는 것도 맞다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이 없어진 지금에서야 얼굴이 산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