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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나의 시

붉은 절망

 

밤이 깊어지며 어두워진 사위로 바람이 밀려든다.

긴 겨울을 버텨왔던 몇몇 낙엽이 마침내 무너진다.

그 거리, 그 떨어짐만큼 집들 사이로 바람이 모여 휴지더미를 헤집고 있었다.

흩날리던 종이 위로 이름 석 자가 함께 떠다닌다.

종이 위, 공기 속으로 여러 명의 내가 존재했다.

어느 골에 모인 바람이 뱅뱅 돌았다. 어지러움과 맑아짐이 교호했다.

회전과 상승 속에서, 몇몇 덩어리들은 다시 떨어지고 모인다.

 

3월 초입, 조금 길어진 햇빛으론 아직 덥혀지지 않았다.

듬성듬성 매서운 바람이 나를 감쌌고, 그 속에서 돋아난 염세적 눈빛으로

어린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새로 장만한 교복을 입은, 푸릇함이 싫다.

피눈물로 글자를 적다 이내 발로 비벼 꺼버렸다.

절망은 붉은색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무릎 꿇지 않았다.

허름한 벽에 매달린 가스 배관을 잡고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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