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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나의 시

남한산성

유난히 춥고 길었던, 그 해 겨울.

얼어붙은 강물에 걸음은 쉬이 미끄러졌고,

그 혹독함 속에 누구도 마른 낙엽 하나 줍지 못했다.

동상은 솜털처럼 비루한 몸 곳곳을 채워갔지만,

하얀 세상에 멀어버린 눈으로는 찾을 것이 없었다.

거대한 성벽이 우리를 가둔 채 곳간은 비어갔다.

 

작은 승리는 큰 산을 넘지 못했고, 해서 쉼 없이 산의 능선을 노려다 본다.

()이 아닌 사람이 저 너머에 있을까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가마니에 엉덩이를 비벼댄다.

우리의 숨바꼭질은 술래가 없었다. 그들은 훤히 불을 밝히고 지폈다.

따뜻한 화덕을 둘러싸고 핏기가 가시지 않은 육() 고기를 굽고 있었다.

술래들은 우리를 찾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조금 더 따뜻한 곳에서 푸짐한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진정한 의미의 인내심 싸움. 한기와 허기는 가끔 적의(敵意)의 방향을 돌리곤 했다.

 

매일 밤, 나는 성을 넘고 싶었다.

전란 속에도 영감(令監)은 영감이었고, 임금도 임금이었다.

 

그날 낮, 거창한 명분으로 우리에게 저승길을 안내할 동안

우리 태반은 이미 엎드린 자세로 땅 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겨울의 차가운 무게로 압사당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겨울에 죽어간다던 내 말을 들은 옆집 칠복이는

조금 더 냉철한 말투로 죽기 바로 전 나에게 고백했다.

자신은 사실 살아있었던 적이 없다고.

 

임금은 결국 예를 갖췄다.

늘 받던 것을 주는 사람의 마음은 비통하다.

삼전도에 피가 스몄고, 아래로만 향하던 임금의 시선은 보다 높은 곳을 향했다.

다만 임금이 본 것은 이 아니었다.

저승길로 향하는 긴 행렬 속에 나 또한 임금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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