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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나의 시

밤 같던 낮

구름이 너무 짙어 해가 달처럼 보이던 날,

밤 같은 낮이 계속 되던 그 날,

고씨는 그 날도 밤 같은 낮을 보내고 있었다.

도시 전체에 드리워진 어둠 속으로 조용히 걸었다.

운동복 차림에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보는 이가 없다.

삐죽삐죽 삐져나온 빛의 틈을 가끔 경계하며 신나게 걸었다.

바람과 함께 떠밀려온 모래 알갱이들을 씹으며, 거리를 느낀다.

자신 이외에 지나치게 밝은 도시를 고깝게 쳐다본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사육신공원에서 당당히 한강을 본다. 또렷이 노려본다.

거뭇하여 보이는 것 없지만 분명 한강이다.

저 강으로 돌아가려 했던 그 밝았던 날도 떠올려 본다.

그래, 고작 그 정도의 화려함이야. 이미 지나간 과거잖아.

나도 지나갔고, 또 지나가겠지만 너도 그렇잖아.

한강은 말이 없다.

그래, 대답마라. 지금은 너의 시대가 아니다.

발길을 돌린다. 미련이 없다.

책 속에 파묻어 버린 시절이 무색하게 젊어 보인다고 느낀다.

가게 유리에 비친 실루엣은 건장했고, 아직 시간은 많다.

천천히 걷는다. 그 동안 빨랐던 만큼 더 천천히, 느리게 걸었다.

밤은 나의 시간, 나만의 시간.

서서히 옅어 지는 구름을 뚫고 햇살이 내려온다.

갑자기 확 퍼져나가는 햇살.

육교 위를 지나던 고씨는 피할 새도 없이 민낯을 드러냈다.

갑자기 무대에 등장한 배우라는 느낌이 고씨에게 덮친다.

고씨는 외쳐버린다. ‘나는 할 수 있다.’

몇몇이 화답한다. ‘나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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