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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문화/좋은 시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_이진명

나는 나무에 묶여 있었다. 숲은 검고 짐승의 울음 뜨거웠다. 마을은

불빛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어서 빠져 나가야 한다. 몸을 뒤틀며

나무를 밀어댔지만 세상모르고 잠들었던 새 떨어져 내려 어쩔 줄

몰라 퍼드득인다. 발등에 깃털이 떨어진다. 오, 놀라워라. 보드랍고

따뜻해. 가여워라. 내가 그랬구나. 어서 다시 잠들거라. 착한 아기.

나는 나를 나무에 묶어 놓은 자가 누구인지 생각지 않으련다.

작은 새 놀란 숨소리 가라앉는 것 지키며 나도 그만 잠들고 싶구나.

 

누구였을까. 낮고도 느린 목소리. 은은한 향내에 싸여. 고요하게

사라지는 흰 옷자락. 부드러운 노래 남기는. 누구였을까. 이 한밤

중에.

 

새는 잠들었구나. 나는 방금 어디에서 놓여난 듯하다. 어디를 갔다

온 것일까. 한기까지 더해 이렇게 묶여 있는데. 꿈을 꿨을까. 그 눈

동자 맑은 샘물은. 샘물에 엎드려 막 한 모금 떠 마셨을 때, 그 이상

한 전언. 용서. 아, 그럼. 내가 그 말을 선명히 기억해 내는 순간 나는

나무기둥에서 천천히 풀려지고 있었다. 새들이 잠에서 깨며 깃을

치기 시작했다. 숲은 새벽빛을 깨닫고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얼굴 없던 분노여.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여.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여.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여.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이여.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이여. 내 너에게로 가노라. 질기고도 억센 밧줄을

풀고. 발등에 깃털을 얹고 꽃을 들고. 돌아가거라. 부드러이 가라앉거라.

풀밭을 눕히는 순결한 바람이 되어. 바람을 물들이는 하늘빛 오랜

영혼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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